왕도는 있다

왕의 길이 있긴 한데 그게 지름길이라고 한 적 없다.

by KayYu

자, 이제 좀 시작해볼까. 이 곡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올림 다단조 (C# Minor) 외에는 아는 게 없다. 곡은 이미 수 없이 들어왔지만 악보는 처음 출력해보고서 어지러운 음표들과 기억이 가물가물한 각종 기호, 표현기법을 책에서, 인터넷에서 찾아본다. 여러 연주자의 연주 동영상도 좀 더 꼼꼼히 찾아 살펴본다.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건반을 다루는 속도는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악보와 건반을 번갈아보면서는 따라갈 수가 없음을 직감한다. 동작이 생각의 속도를 앞서니 악보를 보고 손가락에 지령을 내리는 지극히 논리적인 절차를 거칠 시간은 없다. 그래서 악보 보는 시간이든 건반 보는 시간을 어느 하나는 없애야 하고 그렇다면 몸으로 그걸 외워야 한다는 장벽에 부딪힌다. 그런데 생각은 와, 그게 가능해? 가 아닌 연습하면 그게 된다는 거지?라는 생각이 전혀 거부감도 없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몰랐고 나는 안된다는 고정관념도 있었는데 그게 어찌 그리 쉽게 녹아 없어졌는지 여하튼 그 난이도를 머리로만 이해하고 도전은 시작했으니 무모한 도전이라고 할 수밖에.


효율적인 방법이 있고 기초체력이 필요하겠지만 마음에 불 지른 의욕은 순서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일단 질러 보는 거야. 그렇게 악보를 펼쳤고 한 음 한 음 손가락 위치를 짚어가면서 오른손, 왼 손 건반을 짚어 본다. 무수히 들어 소리로 기억된 화음과 음정은 내가 건반을 눌렀을 때 제대로 누른 것인지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해 주고 어떤 선율이 피아노에서 들려야 하는지도 알려줬다. 초견 능력은 볼품 없지만 계이름은 읽을 수 있고 샵, 플랫 개수는 많지만 어느 건반을 눌러야 하는지를 알고 머릿속에 익숙한 음의 높낮이. 여기까지가 이 곡의 연습을 시작할 때 내가 가지고 있던 전부였다.


즉흥환상곡은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엇박이라는 점 때문에 시작이 어려운 곡으로 분류한다. 속도를 낮춰 천천히 연습을 하는 게 피아노 연습의 정석인데 폴리 리듬 엇박은 속도를 낮춰서는 왼손과 오른손의 타이밍을 개운하게 나눌 수 없게 만든다. 부연 설명하면 오른손이 16분 음표를 연주하는 동안 왼손은 셋잇단 8분 음표를 연주해야 하는데 그 박자가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거다. 그런데 익숙해지게 되면 두 손이 한 마디를 따로 또 같이 연주하는 게 더 수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엇박 때문에 시작이 당황스러운 것은 분명하지만 의외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엇박자 감을 익혔다. 어라 이게 왜 되는 거지? 엇박이 안돼서 고생을 많이 한다는 글들을 여기저기서 많이 보아온 터라 궁금해하면서도 살짝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당황스러웠다. 나 이제 숨겨진 재능을 드디어 꽃 피우는 것인가? 어쩌면 양손잡이인 내가 왼손 오른손이 서로 친하지 않고 따로 노는데 익숙한 덕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시작은 좋았다.


도입부를 제외하고 첫 악절 6~12마디만 무려 6시간 연습한다. 시도했다는 흔적을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일어났다. 이제야 어렵다는 정의가 무엇인지, 왜 어려운지를 누군가에게 설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악보 보랴 건반 보랴 눈과 손가락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지만 이런 반복을 백 번 하다 보면 자동암기가 되는 구간이 조금씩 늘어난다. 손가락 번호와 위치가 뒤엉키는 순간에 부딪혀도 딱 한번 실수 없이 매끄럽게 마음에 드는 순간이 오면 그때 잠시 내려놓고 방안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스트레칭을 하고 다시 시작하면 위치와 터치 감각이 조금 더 또렷해지걸 느낀다. 한 바퀴 도는 동안 불필요한 잡음들이 조금씩 사라져 간다고 해야겠다.


연습곡으로 테크닉을 익히고 도전하는 게 아니라 도전곡으로 테크닉을 연습하고 있었다. 패시지 안에서 동일한 순서로 손가락을 번갈아가면서 굴러 내려오는 패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패턴들이 있긴 하지만 속을 뜯어보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규칙들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진다. 음악이론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기에 혹시나 이론을 체득하고 있다면 훨씬 수월 했거나 애당초 당연시되는 것들이기에 이런 고민조차 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들이 든다. 무던히도 고집스럽게 연습만 많이 하면 이걸 정상 템포의 속도로 연주할 수 있을까? 자세가 올바르지 않으면 팔이 떨어지는 듯한 고통을 받기도 한다는데 정말 어려운 길에 발을 들여놓았구나라는 생각이 이때 즈음 들기 시작한다. 왕도는 있다. 좋은 학습환경, 좋은 책과 섬세한 피아노. 하지만 그게 지름길이라는 뜻은 아니다. 본인이 스스로 땀을 흘려야 한다는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감미로운 2부가 끝나고 나면 원 템포로 1부가 반복된다. 83~118마디. 얏호! 무려 36마디가 앞쪽과 동일하기 때문에 따로 연습할 필요가 없다. 귀로만 듣고 악보를 펼쳤을 때도 몰랐지만 완벽하게 반복된다는 사실은 연습하지 않고도 36마디를 훌쩍 건너뛸 수 있다는 뜻이고 피곤해하던 의욕이 불끈 솟아오르면서 아직 멀게만 느껴졌던 골인지점을 이제 곧 볼 수 있겠다는 안도감도 찾았다.


며칠간에 걸쳐 연습시간만 50시간이 넘어가니 조금만 더 하면 사람을 기계로 만들어 준다는 그 유명한 10,000시간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조금씩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지겨움도 느껴지기 시작한다. 다만 다음 패시지가 무엇이지 생각나지 않거나 손가락 번호를 익히지 못해 건반 위에서 당황하는 경우가 없어지고 암기 구간도 더 늘어나면서 짧은 구간이지만 연주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이해되기 시작해간다. 다만 속도는 여전히 원 템포 절반 수준에서 맴돌고 있고 조금이라도 넘으려는 시도를 하면 잔잔한 호수에 빗방울이 쏟아지듯 여기저기서 미스터치가 연발인 데다가 관절의 움직임이 매끄럽지가 않다는 것을 여실히 느껴진다. 특히 4, 5번 손가락은 절뚝거리는 소리, 기름칠이 말라버린 문짝을 여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진짜로 들린다. 내 몸의 일부인데 내 생각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경험도 꽤나 신선한 충격이다. 그런 고루한 감상에 젖을 때는 아니지만.


인내력을 시험했던 32~34마디. 단련되지 않은 초보자의 절뚝절뚝 삐걱거리는 손가락 마디의 관절 소리의 환청이 우렁차게 들린다. 이건 손가락 독립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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