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있어 걸었는데 걸으니 길이 보인다

생각의 시작점. 피아노도 그곳에서 시작했다.

by KayYu

일주일에 하루는 퇴근길 6.9km를 걸어간다. 운동 좀 하겠다며 조금 빠르게 걸어가면 한 시간 조금 더 걸리는 거리다. 버스를 타거나 운전해서 집에 가는 시간도 뭔가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하는 부지런쟁이는 그렇게 걷기를 시작했다. 이게 그나마 유일한 규칙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지만 그래 봐야 일주일에 한두 번이니 어디 고작 이걸로 운동한다고 명함은 내밀지 못하겠다. 그리고 항상 걸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 좀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출근길부터 운동화를 신고 출근한다. 밤길에 걷는 건 위험할 수 있으니 야근이 없어야 하고, 미세먼지 예보 아이콘은 즐겁게 웃으며 '좋음'을 표시하고 있어야 하고, 너무 더워도, 너무 추워도 안된다. 은근히 까다롭다.


한 시간 남짓 걷는 동안 할 수 있는 것들은 참 많다. 주변에 아무도 없기에 마스크를 잠시 벗고 맑은 공기를 마셔보는 것이 가장 좋다. 무작위 음악 들어보기, 심지어 영어 공부도 할 수 있고, 문득 문장이 떠오르면 휴대폰에 끄적여 볼 수 도 있다. 연락이 뜸 했던 주변 사람들에게 안부 전화도 할 수 있다. 꽃이 피면 근접 촬영하여 아이들에게 보내줄 수 도 있다. 푸른 들판을 보면 잠시 길을 멈추고 씁쓸한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그때 저 땅을 샀어야 하는데...


걷기의 목적은 그래도 건강이 아니겠는가? 기분전환에도 좋긴 한데 사실 기분전환은 특별한 목적이 없을 때 대체할 수 있는 단어이긴 하다. 생각이 필요할 때도 걷는다. 그리고 이유 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구름을 헤아리고 바람을 느끼면서 걷는 것 그 자체가 즐겁기 때문에도 걷는다. 나의 아드레날린은 놀이공원 바이킹을 타고 격렬하게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솟구치는 듯하다. 그리고 가장 중독성 있는 건 무엇보다도 고민거리가 있을 때 걷다 보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곤 했던 좋은 경험이 다시 걷게 만드는 듯하다. 이집트 제사장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하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도 문제가 있으면 걷는다. 오늘도 가벼운 복장에 운동화를 신고 이어폰을 끼고 무념무상으로 걷기 시작한다. 살짝 더운 열기가 남아있는 여름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5월 초.


그렇게 3년 정도를 걸었다. 매번 같은 길을 다니다 보면 지루할 법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매주 모양을 바꿔가는 공사 중인 건물부터 봄이면 벚꽃길을, 여름이면 들녘의 푸른빛을, 가을이면 간간이 보이는 단풍잎을 찾을 수 있고, 심지어 바닥 보도블록을 뚫고 올라온 잡초마저 앙증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땀에 젖은 옷은 덤이다. 달라지지 않은 건 내가 집으로 간다는 그 사실뿐이다.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 무엇을 하든 흥미와 열정이 있다면 새로운 무언가를 끊임없이 발견할 수 있다. 길가에 더 이상 찾을 게 없다면 무엇이든 찾아보려 세상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은 여전하다는 나의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아직은 두 다리가 건강하다는 것으로 스스로 칭찬할 거리를 찾았다.


그런데 더 이상 찾을 게 없었을까? 그 길을 걷다가 '불현듯' 피아노를 다시 시작해 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어떤 연유로 그런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 그 과정과 순간이 전혀 계획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스스로도 참 신선해서 한참의 시간이 지난 아직까지도 겨울 눈 위에 발자국처럼 선명하게 그 순간을 되짚어 볼 수 있다. 그렇게 기분이 좋았던 결정이었나 보다.


사실 이 세상에 무언가 새로운 일이 벌어질 때는 맑은 하늘에 번개 치듯 펑! 태어나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번개도 구름이 뭉개 뭉개 피어오르고 쌓이고 쌓여 더 단단히 뭉치고 부딪히면서 축적된 에너지가 터지는 것이니 번개 치듯 유레카 외친다거나 불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는 의미를 가진 불현듯이라는 표현도 사실 잘못된 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유레카'도 '불현듯'도 내 사전에는 없다. 오랜 시간 자신도 분별하지 못한 감정과 생각이 숙성되어 내공이 쌓여 있다가 어떤 자극에 의해 씨앗의 껍질을 뚫고 나온 것뿐이리라. 남을 칭찬하는 것도 그 사람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남을 비난하는 것도 그렇게 해 보았던 경험이 있기에 튀어나올 것이리라. 다만 그걸 자극하는 도화선은 필요하다.


코로나가 한창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시기에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갇혀 지내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발걸음을 더 가볍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몸은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해도 마음은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답답함에 대한 피로를 깨뜨리고 생활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게 고민이라면 고민이었다. 결국 그날의 걷기가 끝날 무렵 이런 고민 시간조차도 낭비니 이제 고민은 그만하자며 굳힌 생각이 바로 피아노였다.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자고. 그만 바라보고 이제부터 진심을 다해 시작해 보자고.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걸어왔던 발자국은 지금 보이지 않지만 지금 40넘은 '나'라는 사람이 여기 서 있듯, 음악을 너무나도 좋아했지만 나에게 남아있는 게 무엇이냐고 할 때 손에 쥐는 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피아노는 실체가 있다.


불현듯이라는 건 내 사전에 없다고 하였나? 그렇다. 사실, 건반악기는 항상 내 옆에 가까이 있었다. 대학시절 주말이면 잠깐 건드려 보긴 했지만 아쉽게도 전혀 진지하지 못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는 열정의 징표로서 악기가 하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만족감에 뒹굴기만 했었던 듯하다. 뭐라도 있어 보이는 척하면서 차마 버리지는 못하는 예쁜 쓰레기였다. 심지어 그 건반 악기를 보고 있을 때조차도 악기 하나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구석에 웅크리고 눈을 껌벅이고 있을 정도였으니. 라면은 먹고 싶은데 끓이기는 싫고, 뭐 그런 느낌? 비록 몸은 게을렀지만 꿈은 있었고 악기에 대한 관심의 끈은 놓지 않았고 항상 나를 감동시키는 소리를 찾기 위해 귀를 쫑긋 열어두는 것은 게을리하지 않았었다.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클래식 곡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건너 건너 추천받은 명곡들 또한 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쌓아가면 마음의 곳간에 더 이상 채울 게 없을 만큼 가득 차 소화불량이 걸릴 줄 알았는데 그 곳간이라는 장소는 밑바닥이 없는 무한한 공간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걸 알고 나니 살짝 허전해지기 시작한다. 답답함이 잔뜩 싹트기 시작했다.


그 답답함에서 벗어나려면 즐겨 듣는 것 이상으로 내가 빠져 들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느낀 그 순간만큼은 충동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좋은 말을 들으면 보고 싶고, 좋은 책을 많이 보면 글을 쓰고 싶어 진다. 좋은 음악을 많이 들으면... 감동으로 충만해지니 그 음악을 직접 다뤄보고 싶은 마음으로 옮겨간다. 그건 아주 자연스러웠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음악도 있지만 사람에 대한 관심, 예술에 대한 관심, 세상 잡다한 지식에 대한 관심 등 참 좋아하는 것도 많다. 다만 어설플 뿐이다. 그러니 거기에 어설픈 피아노를 하나 더 끌고 오자니 부끄러워진다.


이것저것 좋아하는 걸 다 끌어안고 있으면 안 된다. 그저 좋아하는 것일 뿐이지 열정을 가지고 좋아했던 것은 무엇이 있었을까? 과거의 만행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니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없고 이래서야 인생 후반전에 남는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은 확실해진다. 실속 없이 얄팍한 지식만 쌓인 게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었다. 결국 불만족이다.


누군가의 묘비명처럼 '내 이럴 줄 알았다'를 똑같이 써 놓으면 표절인가? 그런 생각만 하다가 결국 죽을 것 같다. 방법을 알고 있다. 버리면 된다. 버려야 한다. 그것도 지금까지 해 본 적이 없는 정도로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가뿐해진다. 개운하다. 걷던 길에서 펄쩍펄쩍 뛰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무언가의 고민거리가 풀릴 힌트를 얻고 실마리가 보일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바퀴 돌거나 두 팔을 뻗어 올리는 습성이 있다. 지금 바로 두 팔을 뻗어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러본다. 마음이 설렌다. 그래서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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