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 리스트, 쇼팽 즉흥 환상곡 도전
너 자신을 알라. - 소크라테스 - (어떻게?)
음악에 대한 사소하지만 가볍지도 않은 꿈, 어린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 동경, 새로운 도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버무려지던 즈음에 쇼팽의 즉흥환상곡은 이 모든 걸 품어줄 수 있는 목표가 되었다. (뭐 어디서 주워들은 건 다 붙였군. 잘한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고 나의 버킷리스트에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사실 피아노를 다시 시작해보고 싶게 만든 곡은 이 곡이 아니라 캐리비안의 해적 OST였다. 긴장감 느껴지는 풍부한 음향의 오케스트라 연주도 감동이고 피아노 편곡 버전은 악기 하나로 오케스트라를 듣는 듯한 기분이었기에 피아노라는 악기의 능력에 대한 감동이 더해졌다. 하지만 악보도 제대로 읽기 어려운 너무 높은 산이다 보니 눈높이를 조금 낮춰야 했고 그렇게 찾은 곡이 즉흥환상곡이었다. 스포일러를 먼저 들이대자면 즉흥환상곡은 3년이 지난 지금도 다시 시도하기 어려운 여전히 높은 산이다. 눈높이를 한참 더 낮췄어야 했는데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으니...
당시에 그렇게 나의 버킷 리스트에 담긴 로망의 곡을 단지 실력이 부족해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나에게 미안해할 일을 만드는 것 같았다. 무언가 난관에 부딪혔을 때 항상 현대 정몽헌 회장의 '자네, 해 보기는 했는가?’라는 어록이 머릿속에 맴돌곤 했는데, 취미 생활이라고 다를 건 없을 듯하다. 하물며 '버킷리스트'라는 좀 있어 보이는 이름표를 달아 주었으니 이제부터는 하루 늦게 시작하면 후회가 하루 늘어날 것만 같았다. 뭐가 그리 날 절실하게 만들었고 무슨 바람이 이리도 깊이 들었을까?
쇼팽 즉흥환상곡. 30년 전 학원비를 까먹었던 그 어린이는 체르니 30 교재의 10번에서 책을 덮었다. 그렇게 피아노와 헤어지긴 했지만 대학 시절에도 건반 악기를 다뤄보려는 소소한 의지는 있어서 뉴에이지 악보집을 사서 한 번씩 두들겨 보곤 했다. 진지함 따위는 없었고 멋진 연주모습을 상상만 하고 살았지만 그거라도 했으니 그나마 건반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게 만들어 주긴 했다.
즉흥 환상곡 초견은 더블 플랫에 걸린 콩나물 하나의 건반 위치를 알아내려 3초간 순간 정지하고 연필 끝으로 음높이를 세어본다. 즉흥환상곡이 어느 정도 실력이 되어야 연주할 수 있냐는 질문에 답하는 방법도 어렵지만 뒤에 나오는 헨레 나이도 7 수준의 작품이다.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하고 연습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겠지만 긍정의 회로를 풀가동해서 하나씩 해결해 나가다 보면 실력도 늘어나고 이 곡도 언젠가는 분명히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내가 실력이 없기에 못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 고개를 끄덕인다. 인간은 합리적인 게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이니까.
내가 복권 1등에 당첨되지 못한 이유는 있는데 그건 내가 복권을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아한다고 먼저 고백해야 거절도 맞아볼 수 있고 보고서를 작성해야 반려도 맞는 거 아니겠는가? 현실은 말처럼 쉽지는 않긴 하지만 꿈만 꾸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내 것이 되겠는가? 어느 피아노 초보도 한 곡만 수 없이 반복하면 어느 정도 들어줄 만한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동영상을 보았고, 한 번 해볼까 해서 도전한 마라톤 풀 코스도 완주하고 버킷리스트 하나를 완성했다는 그 느낌도 알고 있으니 누가 이 사람을 말릴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지 안 되는 건 아니다는 최면을 걸고서 악보 몇 장 출력해 놓고 김칫국 시원하게 들이켜고 있다.
우선 뭐든 공부를 해야 했다. 우선 곡을 섭렵하려면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엉덩이가 무거워야 하는 것이 중요한데, 현실은 녹록지 않다. 회사 업무도 완전히 회사에 두고 오질 못할 때도 있고 팔을 붙잡고 매달리며 놀아 달라거나 모르는 문제를 들고 오는 아이를 물리칠 수는 없다. 건강을 위해 운동도 해야지... 이러니 지금까지 하던 걸 다 끌고 갈 수는 없겠다는 결심이 선다. 어디까지나 이건 취미생활이니 시간이 있을 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하면 그건 누군가와 언제 한 번 같이 밥 먹자는 인사성 공염불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않은가? 피아노라는 악기는 공들이지 않으면 있는 것조차도 까먹기 쉽고 손가락에 기름칠이 마르면 점점 더 어려워지니 진심 꾸준함이 요구되는 어려운 악기이다. 꾸준히 하기 위한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하고 싶은걸 다 하려는 욕심을 과감히 버리고 버릴 건 버려야지. 비워야 한다. 피아노를 시작하려면 도전하고, 공부하고, 비워야겠다고 마음가짐을 정리해 본다. 난 정리쟁이였다.
아이고. 시작도 하기 전에 요란한 빈 수레는 벌써부터 콩쿠르 우승 소감부터 쓰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