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은 나를 발전시키고, 내가 발전했음을 느낄 때, 즐겁다.
학문의 즐거움 / 히로나카 헤이스케 / 1992
문장은 간결했고 메시지는 명확했다. 경험에서 우러나왔기에 아름다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릴 적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고 수학의 길로 걸어갔던 어느 일본 수학자의 학문에 대한 그리고 삶에 대한 철학을 담은 자서전이다. 열다섯 남매의 일본 번째 아들로 태어나 가정형편상 학문에 전념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온 평범한 유년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서야 수학의 길로 들어서 수학의 노벨상인 필즈상을 수상하기까지 천재가 아닌 평범한 헤이스케는 '끈기'라는 재능 하나로 누구나 존경하는 자리에 오른 인물이 되었다.
단지 수학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담론은 아니다. 우리는 왜 배우는 것이며 어떤 마음 가짐을 갖기를 바라는지에 대한 조언이 담겨있다. 겸손과 도전 그리고 때로는 실패도 배움의 연속이며 그 과정에서 지혜를 얻고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를 깨닫고 그 힘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발견하는 호흡을 가지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삶과 다르지 않지만 그 어려운 걸 실천해 내느냐는 결국 스스로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논어 책 다 읽는 데 반나절이면 되지만 그렇다 하여 우리가 공자가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이 책이 빛을 보인 건 1992년이다. 나의 학창 시절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이었다. 책을 펼치면 형에게 주는 선물임을 알 수 있는 글귀가 있다. 흥미로웠다.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을 만큼 마음을 울리는 글이 안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책장을 넘겨보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문'과 '즐거움'이 두 단어가 서로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웠지만 분명 깨달은 자만이 그 진가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아직 내가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내가 학문을 깊이 탐구하지는 않았지만 설령 내가 모른다 하여 누군가를 평가절하하지 않고 겸손해야 한다는 지혜는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기특함에 스스로를 칭찬해 본다.)
p51. "왜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지혜를 닦기 위해서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이 지혜가 만들어지는 한 공부한 것을 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그 가치는 여전한 것이다.
두 자녀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하지만 과연 책장을 넘기고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은 확신할 수 없다. 그건 두 아이들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동양 고전이나 서양 철학서를 펼쳐보면 참 좋은 성인의 말씀들이 많다. 어른이 된 우리는 그 말씀이 좋은 말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경험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와닿는 것이리라. 아이들에게 그 좋다는 얘기를 들려주어도 누군가에게는 따분한 소음이고 누군가에게는 감동과 깨달음으로 다가오는 한 글귀가 될 수 있다. 그 차이는 오로지 아이들의 경험과 마음에 달려있으니 책을 쥐어주는 것까지는 할 수 있겠다만 그 글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닐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이들에게 선물하는 것이 조금은 망설여진다. 하지만, 지금은 책장 구석에서 먼지를 머금고 있더라도 언젠가 어떤 계기로 책장을 열어보기를 고대하며 마음을 담아 아이들의 손에 쥐어줘 본다.
배움은 물질적으로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한다. 인내를 배우고 내가 누구인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알게 한다. 어린 시절 할 수 없는 것을 선언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자존심을 버릴 수 있는 것도 배움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p139. 수학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도 문제의 입장에서 생각하여 궁극적으로는 '문제'가 '자기'인지 '자기'가 '문제'인지 모를 정도로 서로 융합한 상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결에 실마리가 되는 발상이 떠오르거나 법칙을 찾게 되는 것이다.
p.143 사는 것은 배우는 것이며 배우면은 기쁨이 있다 사는 것은 또한 무언가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며 창조에는 배우는 단계에서 맛볼 수 없는 큰 기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