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과 열정
재능은 들려오는 소리, 열정은 마음의 소리
가장 쉽게 승리한 사람은 재능과 열정이 하이파이브를 한 경우다. 열정도 있는데 재능까지 있으면 신은 불공평하다고 불평과 함께 부러움에 침을 흘리지만 사실 주변에 많지 않을 것이라 위안을 가져본다.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서럽잖아. 자신에게 어떤 재능이 있는지를 찾아내는 건 정말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재능 발견도 어렵고, 주변 사람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고, 내 아이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도 모두 어렵다. 그나마 회사생활에서 나의 역량을 밑바닥부터 끌어내어 쏟아부어야 하는 나의 업무의 좁은 영역에서만 놓고 볼 때 재능은 조금 드러나 보이기는 한다. 아주 좁은 영역이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찾는데 집중하기보다 열정에 더 귀를 기울인다. 열정이 뭐길래? 아마도 열정은 내 안에서 나오고 재능은 밖에서 들려오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는 결국 나 스스로는 찾지 못할 수도 있다. 남들이 볼 때 잘한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은 그냥 어렵지 않게 자연스럽게 해 왔던 것이었고, 자신이 잘한다고 생각하고 생각했는데, 어떤 기회로 남들과 비교해 보니 아무도 관심을 받지 못한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안타깝지만 현실이고 후자에 대한 경험이 훨씬 많을 듯하다. 이때 우리는 현타가 왔다고들 한다.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것만 찾지 말고 내가 잘한다는 것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게 바로 나의 재능이니까. 헛헛, 나의 재능을 떠밀려 인정해야 한다니, 그만큼 찾기 어려운 게 나의 재능이다. 게다가 훌륭한 재능을 발견하였다 하더라도 열정이 재능으로 옮겨 가는 것은 또한 어렵다. 내면의 목소리인 열정을 이기는 외부의 목소리는 많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내면의 목소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또렷해질 뿐만 아니라 하루 24시간, 심지어 잠을 잘 때도 들려오면서 나를 유혹하고 설득하려 들지만 외부의 목소리는 그럴 기회가 많지 않다. 들으면 들을수록 깊어지는 갈등에 혼란스러워지니 일부러 피할 때도 있다.
피아노를 다시 배워보려 마음먹는 것은 열정뿐이었다. 재능은 중요한 게 아니었고 알지도 못했다. 재능이 없어서 배우는 속도가 느릴 수는 있겠지만 열정이 충분히 매워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언젠가 꼭 매울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넘치고 있다. 그런 게 열정의 특징이다. 물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 한다고 칼을 뽑았으니 무를 자르든 조각을 만들 든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고 결과물을 내겠다는 고집 재능은 있어 보인다.
재능 없이 열정만 가득한 아빠를 옆에서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없지만 어떤 의미를 전달해 줄지는 번득 떠올려볼 수 있다. 재능과 열정이라는 말을 다루는 데는 어른과 어린아이가 다르다는 것이다. 두 아이를 가진 아빠로서 열정과 재능 얘기는 너무나 조심스럽다. 열정에는 한계가 없지만 재능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꿈 많은 아이에게 한계가 있다는 얘기를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해변에 가득한 모래가 모두 진주가 될 수는 없다. 진주는 발견되는 것이고 발견에는 스스로의 노력보다는 천부적으로 타고남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무력하게 만든다. 뱁새가 황새가 될 수 없듯이 다른 DNA를 가지고 태어난 자를 쫓아간다는 것은 자기 고문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계가 있는 법이고 그걸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건 자신의 행복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릿(Grit)과 같이 열정만 있으면 된다는 말을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열정은 중요하다. 어떤 분야에서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 열정은 필수다. 엉덩이도 무거워야 하고 지구력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과이지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꿈 많은 아이들에게, 특히 부모 말을 잘 듣는 아이들에게는 조심스럽게 얘기할 수밖에 없다. 그 아이는 그 말을 마음에 새겨 놓고 벽에 붙여 놓고 매일매일 각오를 다질지도 모른다. 엄마 아빠의 말은 다 맞다고 했으니까. 그 사실이 항상 맞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을 나이가 되었을 때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격려해 줘야 하는 건 부모의 몫이다. 재능과 열정이 서로 하이파이브를 해야 하고 재능이 열정을 이끌어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세상은 내 마음 같지 않더라.
바로 그 긍정의 재능 에너지를 나는 피아노로 끌어당겨본다. 음악의 시작은 연주이고 연주의 완성은 음악이다. 그래서 음악에 대한 이해는 악기 연주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십수 년 전 피아노 콘서트라도 갈 때는 마치 평론가가 된 마냥 연주자의 실수나 불안정한 부분을 찾아내겠다고 눈을 부릅뜨곤 했었다. 그러다 진짜 한 음 실수라도 나오면 '어 거기 틀린 거 들었어?'라며 으쓱 대기도 하였다. 90분 연주에 89분 59초의 아름다웠던 연주는 기억에 없고 그 틀린 한 음 1초에 더 많은 얘깃거리를 만들었다는 걸 생각하니 지금 생각하면 여간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율 하나를 제대로 연주해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공들였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어려웠던 순간, 나아지지 않는 것 같은 답답함, 그걸 극복했던 환희 모두 기억하고 있다. 음표의 의미를 해석해 낼 재주는 아직 부족하지만 연습의 어려움에 비추어 연주자의 곡의 완성도를 위한 노력을 이해하는 데는 한 걸음 다가섰다.
작곡가에게 곡을 만든 것에 대한 존경심은 있어도 직접 연주를 들을 수 없고 자기가 연주할 수 없는 곡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작곡자보다 그 음악을 표현하려는 연주자의 노력, 열정에 대한 찬사로 마음이 더 기울어진다. 합리적인 찬사 아닌가? 작곡가가 숨겨놓은 섬세한 메시지를 해석하고 연주해 내려는 연주자의 땀을 이해하게 한다. 어린 꼬마 소녀의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학교 종을 치더라도 다를 건 없다. 음악 그 음을 울려 퍼지게 하는 땀에 무겁고 가벼움의 차이가 있으랴? 음이 울려 퍼지는 순간엔 오로지 진리만이 주변을 감싸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젠 연주자의 실수를 찾지 않는다. 미스터치가 재능이 부족하다고 얘기한다면 유치한 발상이다. 미술을 논할 때 아는 만큼 보인다. 그래서 많이 알면 그만큼 재미있기도 하다. 음악을 들을 때도 아는 만큼 들린다. 음이 틀리는지 아닌지를 찾고 있는 건 남의 잘못을 찾아 흠집 내어 나를 드러내 보이려는 심성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리라. 클래식 초짜의 부끄러운 눈높이를 보여주는 민낯이 아닐까? 정확한 음보다는 연주의 개성이 살아있는 곡의 분위기, 그리고 그 분위기를 계속 이끌어가는 연주자의 손길, 건반을 어루만지는 터치, 셈여림, 명징한 패시지, 곡의 빠르고 느림, 경쾌함과 진중함 등. 언어의 한계로 표현할 수 없는 감성적 표현과 분위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들을 게 많으니 들리는 것도 많다. 재능에 감탄하면서 그 사람의 열정의 숨결을 들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감상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