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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Yu Jul 23. 2022

경영현황 설명회

음악이 밥 먹여 주진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때론 모른 척

     "2020년 첫 경영현황 설명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모두 아시겠지만 오늘은 무거운 얘기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시작하여 꼬박 한 시간 동안 발표자 외의 침묵 속에서 어수선하게 진행된 경영설명회를 한 줄 요약하면 전년도와 비교하여 금년도는 매출이 급감하고 이에 따라 영업이익도 이만큼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니 이제부터 어쩌고저쩌고 에헤라디야 블라블라~~. '급감'이라는 단어도 자주 듣다 보니 내성이 생겨버렸다. 지금까지는 처절하지 않았다는 것쯤으로 이해하면 되나?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경영진으로서 미안하다는 얘기도 빼놓지는 않았다. 사실 우리는 정기적으로 하는 설명회였지만 그전부터 어려워져 가는 실적과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시장 분위기는 금번 설명회가 여느 때와 같지는 않을 것이라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깨 무거운 경영진은 임직원 앞에 나설 때 이 모든 상황을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 없이 얼굴 표정으로 이해시켜버리겠다는 각오임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 무슨 얘기를 해도 길은 정해져 있고 공감 마음도 이미 열어놓은 건 어찌 보면 지나친 호사가 아니었나 싶다.


     경영진은 준비된 자료를 담담하게 때로는 당당하게 설명하며 넘겨 나갔다. 경영실적이 악화된 것에는 담담하게, 앞으로 원가절감을 위해서 인력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 손을 대겠다는 부분은 당당하게. 본인이 낼 수 있는 가장 낮은 톤의 목소리로 읊조리는 듯하였는데, 아마도 2옥타브쯤 내린 레 플랫이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설명이 끝나고 상황이 종료되고 웅성거리며 돌린 발걸음 따라 강당에는 이별의 곡이 흐른다. 분위기에 맞춰 곡을 선정했을 리는 없다. 이전에도 항상 들어왔던 똑같이 깔렸던 배경 곡인데 전에는 문밖을 나가는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차분하게 해주는 편안한 곡이라 생각했지만 오늘만큼은 그 절묘한 타이밍에 야속하기만 하다. 결혼식 축가로 부른 팝송의 가사가 죽은 친구를 슬퍼하는 내용이면 뭐 어떠하랴, 다들 흥겨워하면 되는 거지. 지금 흐르는 곡 이름이나 의미를 몇 사람이나 알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부질없고 쓸데없이 이런 곡 제목을 알고 있어서 더 우울해진다.


    모두들 여기저기서 프레젠테이션 자료로 드러난 숫자가 아닌 그 뒤에 숨어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쿵작쿵작 많은 가설을 세우고 향후 닥칠 폭풍이 무엇인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데이터는 충분히 고문을 가하면 원하는 자백을 받아낼 수 있기 때문에 숫자가 중요한 건 아니다.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숫자는 맞춰줄 뿐이다. 사람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은 절대 회사일 하면서는 볼 수 없는 눈빛이었고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적당한지 모르겠지만 아주 환상적이었다. 그래서 회사가 힘들어졌나? 안타깝게도 누군가는 과장을 더해 소문을 무수히 만들어내고 있었고 부풀어 오른 풍선이 어디로 날아가 터질지 모르듯 불안감도 함께 쏟아내고 있었다. 자기 생각을 얘기하는데 근거가 무슨 필요가 있겠냐마는 오늘자 상황인식과 그에 대한 표현을 '전쟁'으로 정의하기도 하면서 격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마이클 샐던은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에서 미국 월 스트리트 경영진의 금융위기에 대한 상황인식과 그에 대한 비판, 그리고 높아만 가는 실업률과 빨간 경기지표로 나타나는 경제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스톡옵션 성과급 잔치를 벌이는 금융재벌들에 대해서 쓴소리를 한 부분이 있다. 외부환경이 좋지 않아 실적이 악화되었다면 반대로 경기 호황이라는 외부 환경이 좋아져서 늘어난 실적에 대해서도 경영진이 노력한 결과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대신 변호하자면 경영진도 성실한 직원 중 한 명일 뿐이라는 것을. 대화를 하면 서로의 감정은 조금 누그러진다. 하지만 분노가 해소가 되는 건 아니다. 상황을 인식하고 해석하고 소화시키는 건 지극히 개인의 영역이니까. 


    언제쯤이었을까? 아마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며 우한이라는 도시가 도대체 어디에 붙어있는지부터 검색하던 시기에 우리는 희망퇴직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한국으로 넘어왔고 점점 나에게 다가오면서 순서를 기다리는 것 아닌지를 체감했다. 코로나도, 희망퇴직도, 마스크를 안 쓰면 쳐다보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악수는 하지 않는 게 매너가 되었고 엘리베이터 버튼은 팔꿈치로 누르는 게 바람직해 보였다. 희망이라는 단어와 퇴직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수 있는 것인가? 참 잘 지어냈다. 희망퇴직, 명예퇴직, 구조조정… 무거운 주제들이다. 마음속에 항상 사직서가 있고 언제든지 나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건 수 백분의 일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이 책 속 혹은 매체에서나 볼 수 있는 스토리였고 실상은 그런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는 걸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줄 뿐이다. 모두들 무언의 중압감을 가지고 희망퇴직이라는 공고에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이런 상황에서 왜 나가야 하나?라는 질문은 잘못되었다. 계획이 뭐야?라는 질문은 충분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다. 퇴사도 나의 인생플랜에 있어 지나가는 한 점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실체가 없이 여백만 가득했던 내 플랜 노트 앞에서는 무기력해질 뿐이다. 희망퇴직이 인생 2막의 시작이었어요를 받아들일 만큼 내 정신력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회사 울타리를 벗어나려니 내가 잘하는 것은 보이지 않고 내가 못하는 것만 너무나도 커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까지입니다. 시간은 흘렀고 각자 갈 길을 정했다. 어제까지 동료로 즐겁게 마주하던 그들이, 어제까지 선배님~ 하며 다정다감했던 그들이, 어제까지 이견으로 티격태격했던 옆 부서 그들의 내일은 이 회사 안에서는 없다. 시간을 되돌리는 도돌이표도 없다.  점점 여리게도 아니고 그냥 홀연히 사라져 버린 듯하다. 음악기호에는 하던 연주를 중단하고 끊는 기호는 없다. 지금까지의 순조로웠던 경험과 지식이 미래를 보장해주지는 않으니 남아 있든 떠나든 어느 쪽이든 모두 도전이고 모두 용기였다. 나도 둘 중에 하나에 속하겠지만 어느 도전이든, 어느 용기든 부러울 뿐이다. 혹, 남아 있는 게 더 위태로워 보인다면 떠나는 용기보다 남아있을 용기가 더 크다는 의미인데 사실 어느 쪽이 위태로운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그 무게를 재는 건 참 의미 없는 일이다. 어디를 가든 잘 살겠다는 용기가 필요한 순간인 것을. 헤어지도 전에 벌써부터 아쉬워한다. 어디 해외 이민 가는 것도 아니니 사실,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볼 수 있다. 다만 뒤돌아서면 시간은 분명 화살처럼 지나갈 것이다. 무슨 일을 할지 지금으로서는 모르겠지만 두어 달에 한 번은 보자는 의기투합은 6개월, 1년에 한 번도 쉽지 않을 것이다. 관계를 맺는 건 하늘의 뜻이고 그걸 유지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 하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과 이전보다 더 가까워질 자신은 없다. 차라리 해외 이민 간 사람이 한국에 온다 하면 서로들 하던 일 멈추고 만나러 가겠지만 대한민국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리고 모두는 천천히 평범하지만 예전과는 조금 다른 새로운 일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또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그때만 생각하면 쇼팽 에튜드(Etude) 3번. 이별의 곡이 환청으로 머릿속을 떠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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