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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Yu May 12. 2022

음악은 무엇을 하면 그만일까?

글을 뜻을 표현하면 그만인데


음악은 무엇을 하면 그만일까?


공자는 '말은 뜻을 정확히 표현하면 그만이다'라고 하였는데 음악은 무엇을 하면 그만일까라는 질문을 해본다. 공자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게 안되니까 다들 책상에 이마를 찧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쿵쿵...' 공자 미워.


음악을 들을 때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은 사람 수만큼이나 다를 것이다. 그 감정은 지극히 추상적일 것이고. 그래서 무엇을 듣고 있느냐고 물으면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음악을 듣고 있다는 건 듣고 싶은 답이 아니다. 정답도 아니다. 머릿속에 있는 추상적인 이미지를 말로, 혹은 글로 남에게 정확히 전달해보려 창작의 고통을 겪어 본 사람은 얕은 지식을 떠나 언어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 같은 회의에 들어가도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는 흔하고,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는 속담, 외국어에는 있지만 우리말에는 없는 단어들, 이 세상엔 그걸 표현하는 단어가 없을 수도 있고 더 나가면 우리의 생각은 표현할 수 있는 언어 안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니 정답을 찾는 건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단순 명료한 표현이 길고 장황하게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머릿속에 떠올린 이미지가 실제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그 무엇일수록 적확한 단어를 찾기는 세상 어려운 일인 것이다. 음악이 그렇다.


음악 서적을 읽다 보면 음악에서 받은 감정을 말로 표현하려는 몸부림을 바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느낌을 글로 정확히 표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뿐이다.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도 오만가지의 오해를 일으키는데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과 필력에 의지해야 하는 감정 전달은 '네'가 '내'가 아닌 이상 그 어떤 느낌도 남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맛을 어떻게 글로 표현해야 '맛깔나게' 칭찬받을 수 있을까? 맛. 그 실체를 맴돌며 여러 가지 비슷한 맛의 경험을 최대한 끌어들이고 음식에 들어간 재료, 요리방법 등으로 포장해서 그 맛에 가까이 다가가려 노력한다. 홈쇼핑 광고에서 진행자의 눈동자가 커지고 입 한가득 머금고 즐거워하는 표정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고 말로 표현한 수 없음으로 맛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도 진정 그 맛의 실체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음악을 설명하려 음악 서적은 음악가가 살아온 배경, 작품에 대한 탄생 배경, 숨겨진 이야기, 곡의 구성 등을 쏟아낸다. 하지만 내가 들어보지 않았던 작품을 얘기할 때는 건져 올릴 것 없는 여느 수다와 다를 바 없다는 걸 느낀다. 그래도 맛에 비하면 눈으로 보여줄 수 있는 표기방법인 악보라는 게 있으니 '설명'이라는 것을 시도해 볼 수는 있다. 악보의 일부를 발췌해서 해설을 곁들이면 음악을 읽을 수 있고, 훈련된 사람들이라면 상상의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나 같은 초보자는 금세 한계에 부딪힌다. 텍스트로 지식을 쌓은 만큼 음악 감상의 즐거움은 커지겠지만 반대로, 곡을 알지 못하니 책을 읽어도 지식이 잘 흡수되지 않기 때문이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우연히 들었던 곡이 좋아서 책을 찾아보든, 책을 보다가 관심이 생겨 그 음악을 찾아듣든 좋으면 닥치는 대로 하는 거다. 음악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탐 구하기 위해 책을 펼쳐보았지만 텍스트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장벽에 부딪혔다.


베토벤 월광 1악장이 잔잔하게 들려온다. 내가 좋아하는 곡인데도 그 소리에 대한 첫 이미지는 참 허탈하게 들렸다. 왜냐하면 잠시 음악 소리에 귀 기울이며 발걸음을 멈춘 곳은 가족들과 관광 온 깊고 거대한 동굴 안이였기 때문이다. 대자연이 영겁의 세월 동안 만들어 낸 경이로움에 입을 벌리고 흠뻑 취하고 있을 때였으니 그 기분을 짐작할 수 있을까? 월광 1악장, Adagio(느리게) C# minor에서 떠오르는 감상이라면 서정적이면서 진중하고 엄숙함, 때론 긴장감이 감돌기도 한다. 잠시 딴 얘기로 베토벤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지어진 '월광'이라는 이름에서 달 빛 아래 고요한 호수가 이미지가 떠오르려 하는 것을 억누르고 자신만의 감상을 느껴보자. 물론, 달 빛 감상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후광효과를 지워버리고 나의 감정에 충실해 보자는 뜻이다. 다시 동굴 안으로 돌아왔다. 관광지 관리자는 어떤 의미로,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 월광곡을 선곡하였을까? 아무 생각이 없었다면 정말 실망할 부분이기는 하다. 나의 긍정 회로를 풀가동 하여 잠시 그 허탈함도 자연이 주는 감동만큼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기에 들리는 그대로 동굴 안 월광의 선율을 받아들여보기로 한다.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살짝 맥도 빠진다. 어쩌면 동굴 안 습기로 바닥과 손잡이들이 미끄러우니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주위를 살펴보면서 조심하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 호흡에 쉼표, 이게 동굴 속 월광 선율의 두 번째 이미지였다. 흠... 아무리 그래도 화려한 대곡을 선곡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무심했다는 생각은 어쩔 수 없을 듯하다. 그래서 동굴 선곡에 좋은 점수를 주지는 못하겠다.


음악을 듣는다. 기분이 변한다. 즐거움, 슬픔, 흥분, 우울.... 텍스트는 눈으로 입력되는 순간 감정의 본질에서 멀어지거나 그 단어 하나로 생각은 협소해지니 나의 기분을 설명할 수 없다. 눈으로 보는 그림도 보는 순간 그것을 분해해서 해석하고 스스로 나에게 설명하려 든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들을 수 있는 소리, 음악은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지만 실패한 나의 감정의 간극을 채워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음악은 나의 기분을 표현해주면 그만 아닐까? 뭔가 결론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이렇게라도 글을 줄여본다. 언어는 한계가 있으니까.


*월광 소나타. 시인이자 음악비평가였던 루트비히 렐슈타프(Rudwig Rellstab)가 월광 1악장을 "스위스 루체른 호수의 달빛 아래 물결에 흔들리는 조각배"라고 비유한 것에서 유래한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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