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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Yu Aug 08. 2022

정체(停滯) – 고인물

갈증이라는 게 이런 걸까?

    정체되고 있다. 나이가 들면 변화를 싫어한다는 게 사실인가? 지난 몇 개월간 똑같은 곡만 하루에도 몇 번씩 듣다 보니 문득 이렇게 듣고도 지겹지 않아 하는 나에게 스스로 놀랐다. 반대로 이렇게 지겨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음악이 이 세상에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함께 들기도 하면서. 아무리 해도 지겹지 않은 일, 자다가도 하고 싶어서 잠 못 이루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일, 머리에 속속 들어오는 일. 이 중 어느 하나라도 해당되면 당장 해야 한다고 하였다. 바로 그런 일이 당신을 성공으로 이끌어줄 일이라고 한다. 나를 비춰보면 아무리 해도 지겹지 않은 일에 음악이 있지만 이걸로 밥벌이를 대신할 만한 성취를 이뤄내기에는 실력도 어림없을 뿐만 아니라 내 나이에 미뤄 타이밍도 적절치는 않아 보인다. 참 길게도 썼네.  그냥 하던 일이나 잘 하라는 뜻이다.


    휴대폰에 1,200곡 정도가 저장되어 있다. CD플레이어를 없애면서 수 백장의 CD 음반을 팔아치우기 전에 그중에서 가볍게 떠나보낼 수 없는 앨범들의 음원을 추출하여 저장한 곡 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모든 앨범들은 언제든지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겠지만 저장된 곡은 어쩐지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니 더 애착이 간다고 할 수밖에. 그렇게 지난 25년간 음반으로, MP3 음원으로 차곡차곡 플레이리스트에 추가된 곡들의 이력을 더듬어보면 시간이 갈수록 저장되는 곡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80% 이상은 20년 전의 앨범들이고 최근 5년 사이에 추가된 곡은 채 100곡도 되지 않는 듯한다. 최근 1년으로 더 좁혀보면 손가락, 발가락만으로도 다 셀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250년 전 베토벤 음악이든 얻어걸린 어느 록밴드의 곡이든 선택에는 시간도 장르도 없었다. 20년 전 그때는 음반을 몇 장이나 구매했는지, 마니아층에서 알아주는 명반을 어디서 어렵게 구했다고 자랑질을 하는 맛도 있었다. 종로와 홍대 음반점들의 거리를 돌며 부지런하게 발품 팔았던 나의 노력의 결과물을 보여줄 수 있었고 선후배들에게 빌려줄 수 있는 거리가 하나 생긴 것만으로도 베푸는 마음을 챙길 수 있었다. LP가 서서히 사라지더니 CD는 더 빨리 사라졌고 대부분 디지털화가 되어버린 지금 이제는 음원을 몇 번이나 다운로드했는지 그 숫자가 말해준다. 다만 그런 얘기를 나눌 선후배가 옆에 있지 않은 게 하나 더 다른 점이라면 다르겠다. 음원 다운로드 시기도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다. 유튜브와 데이터 무제한의 환상적인 조합은 그 다운로드조차 귀찮게 만들었고 맑은 음질이 절실했던 애증의 소수 몇 곡의 음원 구매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것도 몇 년 전인지 모르겠다. 아이러니한 건 그 옛날 그 시절처럼 라디오에서 알려주는 곡 제목이나 음반점 주인장이 추천하는 앨범을 찾아 발품을 팔 일도 없고 이제는 손가락만 까딱해도 되는 세상인데 그 쉬운 것조차도 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그 많은 음반점 사장님들은 지금 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실까.


    되돌아보면 나중에 커서 무엇이 될지 고민하며 책과 씨름하면서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무럭무럭 소비하면서 그 무엇도 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편안했다. 그 시기를 지나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면서 슬슬 취업의 벽이 높아 보이기 시작하고 무한 긍정의 마인드도 점점 수그러들더니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있지요'라며 던지던 농담이 더 이상 농담이 아니고 내게 화살이 되어 되돌아올 것 같은 불길함을 머릿속이 아닌 몸으로 직접 체험하며 깨달아가던 시기를 맞닥뜨렸다. 80%의 음원이 채워진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음악 갈구할 시간에 공부를 더 했어야 할 시기였는지 모르겠다. 취미가 뭐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나이 지긋한 면접관 어른들께서 관심 있을만한 음악 장르만으로 급히 머릿속을 편집해서 3분 정도 털었던 기억이 있다. 면접관이 음악을 좋아해도 취향이 어긋나면 심통 하게 볼 수 있고,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관심 없는 얘기라면 어차피 좋은 이미지를 줄 수도 없겠거니 생각하면서 어디까지 털어야 할지 조심스러운 3분이었다는 걸 기억한다. 그 면접관이 듣고 싶어 했던 취미로 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회사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 이후 그래도 다행스럽게 취업에 대한 고민은 길지 않게 끝났고 꿈꾸던 직업은 아니었지만 또 상상하지 못했던 일도 아닌 일을 하면서 사회생활의 안정을 찾아가니 음원은 차츰 줄어들고 그 이후 그 긴 시간 동안 나머지 20%가 채워졌다. 


    편식하면 건강에 해롭기도 하지만 꾸준히 먹어도 좋은 건강식단도 있다. 1만 시간의 법칙도 있는데 한 우물만 파는 게 좋은 건지 헷갈리기는 한다. 하지만 본능에 이끌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을 또 다른 나의 곡을 찾아본다. 1,200곡에서 정체(停滯)되어 있는 우물 안 개구리, 고인물이 되어감에 더 넓게 눈을 뜨고 싶은 갈증을 느낀다. 그런데 어쩌다 고인물이 최고 실력을 가진 고수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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