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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Yu May 21. 2022

음악이 들리지 않는 공간

시골집에서 4분 33초의 감동

음악이 떠오르지 않는 공간이 있다. 마치 며칠간 잠에서 깨어나 몽롱한 것처럼 무언가를 떠올려보려 노력해도 잘 떠오르지 않는 공간이다. 시골집이다.


이 세상 모든 시골집은 추억의 장소이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사진 속으로만 있고, 정겨운 할머니께서 홀로 사셨던 곳이다. 명절날이면 친척들, 사촌 형들과 함께 따뜻한 아랫목에서 어른들이 주는 과자를 품고 주신 용돈에 마음 풍요롭게 놀던 기억이 가득한 곳이다. 할아버지가 써 놓은 한자가 가득한 책들과 오래된 물건들을 호기심 있게 찾아보던 작은 방,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가야만 했던 무서운 화장실, 개 똥 밟을까 겁나서 함부로 다니지 못했던 뒤안길, 마당 앞 높다란 감나무에 올라가다 가시 박힌 손바닥에 울면서도 혼나던 기억, 언제 해도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아궁이 불장난, 마루 밑에 잠자던 어미 개와 새끼 강아지들.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어느 곳을 살펴봐도 진하게 물들어있는 아련한 기억들이 이제는 색 바랜 흑백사진처럼 영상으로 떠오른다. 할머니의 목소리, 큰아버지의 잔소리, 고모가 부르는 소리가 북적할 뿐 항상 무언가를 흥얼거리는 나인데 여기서만큼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묘소를 방문하고 나서 잠시 시골집에 들러본다. 어쩌면 지난 1년간 유일한 인적의 발걸음 일지 모르겠다. 그렇게 정겨움만 가득했던 시골집은 이제 아무도 찾는 이 없어 발목까지 솟아오른 잡초와 섞어 부러진 감나무, 손길이 없어 푸석해지고 무너지기 시작한 담벼락만 남아있다. 자물쇠로 채워진 창고 안에는 내가 가지고 놀았던 삽, 톱, 호미 같은 농사용 도구들이 있다는 걸 알지만 자물쇠 열쇠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한 그루의 감나무만이 흐드러진 잎을 키우고 홀로 감을 매달고 홍시가 되어 떨구기를 반복하고 있는 듯하다. 유일하게 새로워진 건 관청에서 붙인 손바닥만 한 파란색의 동 호수 명패뿐이고 많은 다른 것들이 더 부서지고 흩날리며 마당에 뿌려지고 있다. 마루에 걸터앉아 바라보니 봄 산들바람이 마당의 그 먼지들마저 쓸어가고 있다. 그렇게 이름 그대로 먼지만큼 쓸어갔지만 내년 이 맘 때 즈음 다시 오면 또 달라져 있을 것 같다.


유일하게 나를 알아보고 반겨주는 근처 당숙 내 집으로 간다. 이제 곧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에 비해 여전히 정정하시지만 최근에 급격히 노쇠해진 모습을 보이신다. 지나가다 들린 길이기에 신발을 벗지도 않고 마루에 걸터앉아 건강은 어떠신지를 물었고 당숙께서는 친인척 돌아가는 사정을 말씀해 주시곤 했다. 근래는 젊은 시절에 대해서도 자주 얘기하신다. 27살 결혼했던 그 당숙은 창경궁 경비원 자리를 알아 봐준다는 얘기에 상경했지만 초등학교 졸업장뿐인 그 청년에게 내 줄 자리는 아니었다고 한다. 형편이 어려워 동생자신은 중학교에 갈 수 없었다는 푸념에 한탄도 이어진다. 그냥 빈 손으로 내려갈 수 없었던 그 청년은 좁디좁은 하숙집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던 젊은 자신에 대한 연민이 담긴 이야기를 쏟아낸다. 조선호텔, 청계천, 구파발, 북악산, 흑석동, 경희대, 면목동, 구리시를 돌아 연로해진 몸은 젊은 그 사람의 기억은 서울에 남겨두고 다시 남쪽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당숙께서 하시는 말씀을 최대한 모두 기억하려 귀를 열었다. 50년의 이야기를 하시는데 채 10분도 걸리지 않으셨지만 이제 이런 얘기를 해 줄 사람도 얼마 남아있지 않고 어쩌면 다음에 와도 다시 들을 수 없는 얘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시골집이 즐거웠던 그 시절은 음악이 좋다는 감정도 없었던 너무나도 어린 시절이었고, 음악이라는 것을 듣지도 않아서일까? 딱히 생각해보면 라디오가 아닌 다른 형태로 저장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시골집, 시골 마을과 엮여있는 추억 어린 음악이 없었다는 게 지금 어떤 음악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이유가 될 것 같다. 그 공허함을 뚫고 맑은 하늘, 조용한 시골마을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온다. 심심하지 않게 한 번씩 울어주는 새소리가 어쩌면 시골의 음악이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음악이 떠오르지 않은 것이지 음악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문득 4분 33초를 연주하던 존 케이지의 인사이트를 어슴푸레 깨닫고 아무도 듣지 못할 감탄사를 조용히 내뱉는다.


당숙 할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집으로 향하는 차에 오른다. 시동을 켜고 라디오를 켜니 화창한 봄 날씨에 딱 어울리는 마로니에 '칵테일 사랑'이 흘러나온다. '마음 울적 한 날에 거리를 걸어 보고...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이십일번 그 음악을 내 귓가에 속삭여주며...'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이십일 번? 여전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십일 번. 분명 너무도 좋아하는 곡인데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북적한 도시의 소음 속에 파묻힌 나의 공간으로 돌아와야만 그 피아노 소리가 들릴 것 같다. 음악 없으면 못 사는 줄 알았는데 새소리가 음악을 대신해 주었던 평화로운 경험을 한 어느 날 오후였다.


전선줄이 음표 없는 오선지로 보인다. 나, 미친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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