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의 아리아
7년 만에 다시 찾은 여름 스키장에서의 꿈
7년 만에 다시 찾았다. 전에도 여름에 갔던 스키장이고, 올여름 또 찾게 되었다. 겨울에 간 건 그보다도 한참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할 만큼 어쩌다보니 여름스키장이 더 익숙해져있다. 강원도 여름 스키장의 이미지는 교통이 편리하여 접근하기 좋고, 꽤 높은 위치에 있으니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어느 스키장이든 믿고 갈 수 있게 해 준다. 사실 일부러 처음부터 여름 스키장을 찾은 건 아니었다.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방향만 선택해 놓았지 괜찮아 보이는 숙소는 이미 만실인터라 선택의 여지없이 그나마 여유가 있는 여름 스키장 콘도를 예약한 것이다. 여느 심리검사 질문지에 항상 등장하는 '무작정 떠나는 여행이 좋다', '계획적인 여행이 좋다'라는 선택지에 '그때 그때 다르다'라는 선택지가 없어 항상 오락가락한다. 여행 그 자체는 계획적 일지 몰라도 두어 달 전부터 예약을 해 놓는 건 또 내 체질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아마 7년 전에도 그랬으리라.
드라이빙을 좋아해 장장 250킬로가 넘는 거리를 쉴 새 없이 달려도 지루함은 없었다. 똑같은 출퇴근 길도 뭐가 더 볼 게 있는지 지나가는 사람들 건물들 자동차들에도 호기심 있게 쳐다보곤 했는데 기억 가물가물한 새로운 길을 무려 250킬로나 달린다는 생각을 하면 설레기까지 한다. 중간에 휴게소는 별미일 테고. 사람, 건물이 없다면 푸른 들녘, 멀리 혹은 가까이 솟구친 산새, 드문 드문 산골마을로 눈을 채운다. 깔끔하게 정비된 고속도로 그것마저 즐거워 과속단속 카메라에 손가락 V자를 그려보기도 한다. 과속한 건 아니니 찍힐리는 없겠지만 적당한 속도감은 산새 바람과 함께 가슴 뻥 뚫리는 상쾌함을 준다.
한창 학교 다니던 시절만 해도 여름이면 스키장이 잠시 문을 닫는 줄만 알았는데 요즘은 문을 닫는 건 주변 스키샵뿐이고 상당수는 정상영업을 한다. 여름은 점점 길어지고 반대로 겨울은 짧아지는데 언제까지 겨울 장사로만 먹고살 수 없으니 거대한 휴양시설에 파도풀 정도는 기본으로 갖춘 워터파크를 들여 사계절 휴양 경쟁으로 들어간 건 최근의 일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우거진 나무 사이로 수 십 개의 슬로프가 선명하게 포진된 스키장이 전체 휴양시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아무리 워터파크가 있다 하여도 그곳은 종합휴양지가 아닌 겨울 스키장 이미지가 더 강하게 남아있는 건 어쩔 수 없다.
생소한 여름 스키장은 여타 관광지에 비해서 한적함에서 오는 묘미가 뜻하지 않은 만족감을 준다. 곤돌라를 타기 위해 가는 길, 잠시 문 앞에 멈춰 아무도 없는 곳을 사진 찍어 본다. 알록달록한 화려한 스키복과 누군지 정체를 꼭꼭 숨기고 있는 고글과 마스크, 여기에 스키와 스노보드를 들춰매고 때론 뒤뚱뒤뚱 우스광스럽고 힘겹게 오가는 사람들로 세상 시끄럽고 북적이던 장소였다. 다 털어내지 못하고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눈 뭉치들과 덕분에 축축하고 미끄러워진 바닥, 어디선가 가냘프게 불어오는 히터의 온기와 그 사이로 들려오는 웃음소리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두터운 장갑 때문에 감히 휴대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을 엄두는 내지 못했던 곳이기에 특별한 사진이 남아 있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지금 텅 빈 그 공간이 주는 적막감은 묘한 기분을 들게 하고 이 기분을 후에 글로 남길 거라는 직감을 한다. 인류멸망의 아포칼립스 후 1년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상상해 볼 수 있는 곳이다.
다시 찾아본 장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어서인지 특별히 가고 싶은 장소도, 액티비티도 선뜻 마음에 내키지는 않는다. 휴가 사유로 ‘휴가’를 적었으니 정말 할 게 없고 진심으로 하고 싶지 않다면 최후의 선택지로 숙소에서 바람소리, 새소리 들으면서 아무것도, 격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거실 바닥에 만세 자세로 널브러져 있는 것도 해 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이긴 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섬세한 계획이 있었긴하나 나 혼자만의 생각에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내기에는 용기가 없었다. 출발할 때부터 그 무엇을 하든 뽕을 뽑아야 한다는 신념은 치밀한 계획의 '널브러짐'을 용서하지는 않을 것 같다. 모차르트의 대곡들이 탄생하던 시기는 그의 주머니가 텅텅 비워졌을 때였다는 걸 아시는지? 깊숙이 숨겨진 당신의 창의력을 끌어내고 곧장 실행에 옮기도록 만드는 건 음악에 대한 열정보다 더 위대한 빵 살 돈이 없었던 빈 지갑이었다는 것이다. 여하든 본전 욕구는 머리를 쥐어짜 여행 계획을 만들어 내었고, 7년 전 사진을 들춰보고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남겨보자고 했다. 사실 어디를 가도 7년 전과 똑같은 건 없을 것이기에 어디 어디가 달라졌는지 틀린 그림 찾기처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같은 위치에서 사진을 찍어 두 아이의 자라난 모습도 확인하고 나중에 더 시간이 지나면 그 비교 사진이 또 다른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다행히 호응이 이어졌다. 물론 두 아이 자라난 생각만 했었지 두 어른이 늙어 가는 씁쓸한 모습이 담길 줄은 나중에 사진을 보고서야 깨달았지만.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가족의 사진을 비교해 보니 7년 전 두 아이의 발은 땅에 닿지도 않았고 모자가 너무 커서 조막만 한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이제 발을 쭈욱 뻣어야 그네에 앉을 수 있는 아이가 아닌 어린이가 되어 있었다. 고분고분했던 착한 아이는 어디 가고 진심 말 안 듣는 아이라는 것은 사진이 알려주고 있진 않지만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만 알고 있는 가족의 비밀이다. 그리고 양 옆에 아빠와 엄마. 흰머리가 보일 리는 없겠지만 살짝 처진 어깨선과 움츠러든 자세는 살짝 애처롭게 보인다. 이건 기분 탓이라고 하고 싶다.
밤이 되어 별을 찾아 잠시 혼자 나온다. 반짝이는 별도 좋아하지만 음악을 듣는 것도 좋아하니 여행은 두 가지를 함께 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이다. 바흐 골든베르크의 아리아를 듣는데 헤드폰의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필요가 없는 공간이 이 세상에 그리 많지는 않다. 밤하늘의 별과 별 사이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 듯, 아리아의 한 음과 한 음 사이의 빈 공간에 아무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무엇이 채워져 있는지를 관통해 내는 건 당신의 지식과 무한한 상상력에 맡겨야 할 것이다. 바흐의 아리아에서 록 음악으로 바뀐다. 이 어둠과 적막감과 반짝이는 별 빛에 어울리는 건 아리아이긴 하지만 뜬금없는 록이라 하여 싫을 것도 없다. 세상 살다 보면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니까. 그저 휴대폰 플레이어의 무작위 선택에 맡겨보면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두 아이와 함께하고 있는 어른이지만 가끔 이렇게 혼자 있으면 나에게 묻묻는다."넌 커서 뭐 될래?" 아직도 커가는 게 있다면 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는 꿈이다. 이제는 원래 꿈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다. 저 멀리 사람들이 부대끼고 있는 도시 불빛 속으로 다시 되돌아가면 경제적인 독립도 꿈이고, 회사 일이 잘 풀려나가는 것도 꿈이고, 가족들 건강도 꿈이고, 피아노 실력이 좀 더 늘었으면 하는 것도 꿈이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소원을 빈다. 꿈, 소원, 기도. 모양만 달리하였지 서로 다를 것은 없다. 확실한 건 과거뿐이고 미래에 확실한 건 죽음뿐이니 그때가 올 때까지 꿈은 계속된다. 그래야만 한다. 지금 듣고 있는 이 음악. 언제부터 들었고 앞으로 얼마나 더 들을 수 있을지도 궁금해진다. 7년 전 무엇을 들었는지 기억은 없다. 하지만 오늘의 기억은 앞으로 7년, 아니 그 이후로 주욱 지금 이 기록으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지금 수 백만, 수 억년 전에 출발한 빛을 내가 지금 보고 있고 그 보다는 짧지만 300년 전에 시작한 바흐의 음악을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