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정경
슈만 어린이정경 13곡 중 7번째 곡. 트로이메라이(꿈)이다. 슈만은 그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담아내기 위해서 어른스러운 기교마저 싹 빼어버리고 오로지 동심의 눈높이로 작곡한 곡이라 생각한다. 그 목가적인 풍경은 어쩌면 클라라와의 달콤한 미래에 함께 뛰노는 마음속의 자신의 아이들을 바라보며 담아낸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곡에는 어린이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평화로움이 한가득 진하게 배어있음을 느낀다. 그런 배경과 이름 때문이긴 하겠지만 악보를 펼치면 두 딸아이들이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한다. 그래서 이 곡은 저 멀리 타지에 있을 때 아이들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는 곡이라 생각하며 연습하곤 했다.
곡은 짤막하다. 하지만 여운은 깊다. 한 페이지짜리 악보로 2분 30초 전후지만 지시된 Moderato보다 더 느리게 연주해도 여전히 그 맛은 살아있고 무드는 더 깊어진다. 오히려 좀 더 느리게 연주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데, 내 생각을 응원해주는 메시지도 찾았다.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도 주어진 템포 8분 음표 = 100으로 연주해서는 꿈 근처에도 못 갈 것이고,... <알프레트 브렌델, 피아노를 듣는 시간, 홍은정 옮김> 중간중간 리타르단도와 늘임표(페르마타)가 있으니 이들과도 균형을 맞추려면 굳이 악보의 템포를 너무 기술적으로 해석하는데 집착하지 말고 나의 감정을 살려서 서두르지 말고 평온을 유지하는 게 작품을 즐기는데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저기 붙임줄, 이음줄은 꼼꼼하게 잘 읽어줘야 하고 두 음을 한 손가락으로 커버하면서 분명하게 표현해 줘야 하는 부분이 조금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붙임줄에 주의하지 않고 은연중 페달을 누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런 습관은 작곡자의 원곡을 무시하고 악보를 대충 읽고 아티큘레이션 표현력을 항상 제자리에 있게 만드는 잘못된 습관이다. 페달로 처리할 때와 붙임줄을 표현할 때의 미세한 차이를 전문가각 아니라면 잘 감지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 타협하는 건 줄여보려고 노력한다. 쉽게 쉽게 나가려는 페달의 유혹을 이겨내야 피아노 초보자 딱지를 뗄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둘째 딸의 분노의 일기장이 연습 도중에 문득문득 떠오른다. 한 줄 요약하면 엄마가 자기한테 너무 많은 상처와 스트레스를 준다는 것이다. 학업에 신경 쓰고 조금 더 부지런하고 바른 성품을 가졌으면 하는 엄마 아빠의 마음이 은연중에 나타났을 것이고 아이는 그걸 용케도 캐치해 냈다. 잔머리 마왕 둘째가 그걸 꾸며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의심도 있긴 하지만 잊기로 했다. 우리가 흔하게 주고받는 일상 대화에도 편향적이지 않고 절대적으로 중립적인 단어가 많지 않기에 내가 언제 어디서 뱉은 말이 딸아이에게 어떤 식으로 상처를 주었을지 일일이 기억하지도 못한다고 스스로 변명해본다. 본인이 밤늦도록 숙제 안 하고 유튜브에 빠져있던 건 어떻게 설명하는지 두고 보자며 순간 벌컥 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장문의 편지 앞에 네가 맞다는 말로 시작하는 게 지금 이 시간만큼은 이 아이에게 맞는 훈육인 듯하다. 이렇게 둘째 아이에게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 아무런 메신저 반응이 없고 전화 한 통 없는, 그렇지만 부담 주기 싫어 스스로 부담을 짊어지는 그림자 같은 첫째 아이 얘기를 들어봐야겠다. 부녀지간에 누가 누구를 탓하고, 누가 먼저 용서하고 행동하기를 기다리며 서운해하겠는가, 누구든 먼저 하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