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3년에 완성된 인벤션과 신포니아. 여기 총 30곡을 처음부터 작정하고 작곡한 것은 아니고 장남 프리데만을 위한 교육용으로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 등에 포함된 곡으로 시작하여 추후 보완을 거쳐 최종적으로 별도로 독립시킨 교재가 된 작품이다. 바흐는 인벤션과 신포니아를 선율 연주의 교본이라고 지칭하면서 '인벤션과 신포니아' 서문 안에 교육상의 목적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2 성부를 열심히 연습해 숙달되면 3 성부도 바르게 연주할 것
2. 머릿속으로 멋지게 그려가면서 전개할 것
3. 칸타빌레(노래하듯이) 주법을 몸에 익힐 것
4. 작곡에 대한 예비 지식을 얻을 것.
단순히 연습 교재로써의 역할뿐만 아니라 작곡에 대한 기초를 쌓을 수 있는 기본이 깔려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교재라고 칭하기 전에 하나의 의미 있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처음 인벤션 1번 BWV 772를 연습할 때 이런 배경을 잘 알지 못했고 단지 바흐라는 대 작곡가를 좀 더 공부하기 위해서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학구열도 가진 피아노 초보생이다. 인벤션 연습은 좌우 선율의 배열이 굉장히 생소하고 뭐 이런 곡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그 당황스러움은 통상 왼손은 반주를 오른손은 선율을 이끄는 그간 연습해 왔던 곡들과 달리 유사한 선율이 왼손과 오른손이 번갈아 가면서 등장함으로써 서로 역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체감하면서 느끼는 모호함과 신선함이었다. 이런 이유로 체르니 연습곡을 비롯하여 대중적인 피아노곡보다 악보의 생김새는 훨씬 간편해 보여도 연주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C major 인벤션 1번의 단선율은 맑은 하늘 하얀 구름과 산들바람이 흐르는 들판에 서 있는 듯한 기분으로 시작된다. 오른손에서 시작한 선율은 이내 동일한 모양새로 왼손으로 옮겨가 반복되면서 전체 선율은 끊김 없이 이어진다. 그런데 어라? 이 양손 엇갈려 쫓아가는 달달한 맛은 뭐지? 라며 연습은 호기심과흥미로움이 교차한다. 바로 <대위법>이라는 악식을 체험 접했을 때의 나의 첫 감동이었다. 대위법이라는 구구절절한 이론적인 얘기부터 시작했다면 이런 감동은 어림도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대위법이 무엇인지, 모티브, 대위 구, 모방.. 이런 용어들이 무엇인지도 전혀 알지 못했던 상태에서 손과 귀는 그간 흔하게 들어왔던 - 주로 낭만파 음악들 - 과의 차이와 그 이전 시대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감상을 전해주었다. 화려한 디지털시계를 보다가 어느 날 서랍장 속에서 색 바랜, 하지만 깊은 의미가 묻어있는 아날로그시계를 발견한 기분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대위법 관련하여 위 용어들 외에 최소한의 몇 가지는 알고 있어야 관련 음악이나 지식을 검색할 때 유용하다. 아 그 거시기 뭐냐... 이럴 순 없다. 이름이라는 게 불릴 때 우리는 서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으니까. 물론 이름 좀 안다하여 어디서 아는 체도 할 수는 없다. 바흐의 음악은 그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학문으로서 한 영역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든, 다른 여러 음악의 악곡 형식은 제외하고라도 <대위법>이라는 형식에 대해서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누구라도 한 번쯤 그것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를 찾아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클래식 음악 역사의 시작이라도 할 수 있는 대목들이 바로 여기서 등장합니다. 대위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서양음악이 전개되어 나가기 시작한 <다성음악> 즉, 여러 개의 소리를 가진 음악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여러 개의 소리는 성당에서 최고의 악기인 인간의 목소리를 내는 성가대가 있으며 그 성가대 안에는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고음의 소년의 목소리, 저음의 성인의 목소리가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높은 목소리는 오른손으로, 낮은 목소리는 왼손으로 표현하는 2 성부 다성음악의 악보가 여기서 출발하게 됩니다.물론 당시 기보법은 지금의 오선지와도 다르지만 자연에서 어느 종(Specis)의 진화를 들여다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기시감마저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진화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연발생적', '선택과 자연도태'라는 용어들이 음악의 역사를 짐작하게 해 주는 데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성가대의 음악이 그 흐름의 꼭대기에 있다면 거기서 한 단계 아래쯤 언저리에 있는 인벤션의 악보를 보면 휑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뭔가 어색하다. 속도도 페달도 아티큘레이션 표기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연주는 쉬울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키는데도 한 역할을 하겠지만 꾸밈이 없는 단순함, 전달하고자 하는 본질에 집중되어 있는 순수함이 있어야 하기에 그것을 표현하는 건 결코 수월하지 않다는 것도 배워야 할 점입니다. 소리의 높낮이 외에 거의 없었던 음악은 인간의 활동에서 언어나 문자의 표현을 빌어 전파되었고 시간은 이를 숙성시켜 지금의 클래식 음악에 이르게 된 것이니 아마도 이 세상 모든 오브제의 시초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법칙일 것입니다.
대위법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는 건 사실 거짓말이다. 다양한 학문에서 바흐의 대위법은 심심치 않게 나오는데 특히 수학에서 더욱 그렇다. 그의 음악을 숫자로 변형하여 수학적인 해석을 하려는 시도나,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그림으로 변환시키려는 노력 들. 모두 어떤 패턴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라는데 공통점이 있다. 인간은 패턴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에 패턴을 찾아서 바흐의 음악의 아름다움을 증명하고자 했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지극히 주관적이니 이를 '증명'하려면 객관적으로 변형시켜 줄 수학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바흐라는 사람은 음악의 아버지라며 4지선다 문제를 맞힐 정도의 지식밖에 없었던 나의 무지함으로 그러한 시도들의 의미가 내게 깊이 와닿지는 않았었다. 괴델에셔바흐 같은 소위 까만 건 글자고 하얀 건 종이라고 기억에 남는 어마 무시한 책은 책장 어딘가에 슬그머니 꽂아주기 좋은 책이다. 책 중간에 끼여 있는 책갈피는 내가 이쯤에서 포기하고 덮었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아마도 내가 이해를 못 하는 걸 보니 분명 위대한 책임은 틀림없겠지만.
어느 곡이든 마찬가지이지만 왼손, 오른손 각 선율을 따로 연습하되 선율을 표현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왼손에 좀 더 집중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바흐 시대는 피아노가 아닌 하프시코드였고 페달이 없었으니 음량이나 음향의 잔향을 조절하는 것은 오로지 건반의 터치에서만 가능하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오른손이 먼저 선율을 익히고 골인 지점에 도착해 숨을 고르고 있다면 왼 손은 오른손이 보여줬던 능력만큼 그 보조를 맞춰 음의 간격, 높낮이에 기복이 없도록 고르게 표현되도록 더 많은 연습을 해야 하는 부분이다. 왼 손만으로 선율을 고르게 갖추었더라도 양손으로 함께 연주하면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주거니 받거니 서로 번갈아가면서 양손의 선율 또한 어느 한쪽이 더 강조되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하는 주법은 손가락의 독립과 함께 왼 손과 오른손의 힘의 균형 문제를 꺼내 들게 할 것이다. 오른손은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왼 손은 세모를 그리려고 했던 어린 시절 호기심 어린 장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