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함을 좋아했다. 정확히 알지 못하면 판단을 내리길 주저했던 성향은 신속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좀 살다 보니 이 세상에 어떤 일을 정확히 안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신중함과 신속함 둘 사이의 간격을 줄여보려 노력을 해 본다. 회사는 신중함과 신속함 둘 다를 요구하고 스트레스를 만드는 타고난 기질을 보여준다. (물론 재미 없는 일이니까 월급이라는 것도 준다)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하면 기다리던 휴식이 있다. 그 휴식시간 조차도 사실 신속히 처리해야 할 더 많은 일들이 쌓여가고 있다는 건 우울한 현실이지만. 신중함과 신속함의 균형을 유지해야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일을 신중하게 살피지 못하면 분명 미처 생각지 못해 놓치는 일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걸 눈감아 버리면 언젠가 다시 내게 돌아올 것도 알기에 마냥신속하게 처리해 버릴 수만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빠르면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느리게 연주하면 들린다. 느리니까 들렸다. 원 템포에서는 들리지 않고 숨어있던 아름다움과 감동이 천천히 연주할 때 들린다. K309 전개부 5번째 마디다. 드라마의 한 장면. 누군가가 다녀간 사건의 현장을 다시 찾은 또 다른 누군가의 시선을 따라 화면이 움직이면서 당장이라도 뛰쳐 도망가고 싶은 차가움과 불길한 분위기만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단 4마디 속에 영화 오프닝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피아노 앞에서는 생각은 연주의 속도에 반비례한다. 천천히 연주한 만큼 생각은 많아진다. 신중함과 신속함을 요구하는 일들이 쉼 없이 벌어지다 보니 문득 내가 스스로에 대해, 가족에 대해 소홀히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내가 일처리를 잘하고 있는 것일까? 동료들과는 잘 지내고 있다. 내 일만 열심히 하고 부서원들에게 너무 알아서 잘하라고만 코칭 아닌 잔소리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요건 맞는 것 같다) 아이들은 무성의하고 무미 건조한 대답만 하는 아빠에게 불만이 쌓여가고 있지 않을까? 가족에게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나? 내가 설거지와 집안 청소를 마지막으로 언제 했었지? 아니... 그전에 이건 내가 저녁을 집에서 먹어야지 설거지라도 하는데 집에서 가족과 함께 저녁을 함께 먹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누군가에는 즐거워 보이는 회식자리도 속은 불편하다.
전개부 5번째 마디를 손 끝으로 다시 느껴본다. 오른손 선율이 한 칸 한 칸 올라갈 때 나는 천정 높은 건물 어딘가에 홀로 앉아 있음을 느낀다. 그 공간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모두 한꺼번에 쏟아진다.
Mozart Piano Sonat K309 전개부 5번째 마디. 선율이 올라갈 때 천정 높은 건물 어딘가에 홀로 앉아 있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