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며칠 전 뉴질랜드의 서머타임이 끝남과 동시에 갑자기 한 시간씩 하루가 길어졌다. 타국에서 두 아이 육아하랴, 먹고 살랴 워낙 정신없이 살다 보니 당연히 서머타임이 끝나는 날 인 줄도 몰랐다. 그냥 오후 네시쯤, ‘오늘 뭔가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왜 아직도 네 시지? 왜 아직도 하루가 많이 남았지?’ 하는 생각으로 뚫어져라 핸드폰 시계를 보고 있자니, 문득 벽시계와 한 시간이 차이 난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사실 서머타임이 끝나는 그 날 단 하루만 한 시간이 더 늘어났을 뿐, 다음날부터는 평소와 똑같이 24시간이 다시 반복되는데 엊그제부터 오늘까지 유독 피곤한 게 괜히 억울하다. 안 그래도 빡센 하루, 꼭 한 시간씩 더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저녁때만 되면 괜스레 죄 없는 시계만 자꾸 노려본다.
몇주를 바쁘다고 모른 체 했더니 화단의 잡풀 떼기가 허리춤을 훌쩍 뛰어넘었다. 여름이면 유독 풍년을 맞는 민들레가 너른 뒷마당에 노란 꽃밭을 이뤘다. 내 눈엔 그 질긴 생명력이 예쁘기도 하지만, 이곳에선 그저 잔디 관리 안 하는 게으른 집의 상징일 뿐. 더 이상은 도저히 미룰 수 없어 차고 문을 열고 잔디 깎는 기계를 끄집어냈다.
위이잉 위이잉. 꾸에에엑 털털털털. 위이잉 위이잉. 꾸에에엑 털털털털.
자꾸만 털털 거리며 멈춰 서는 기계.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묵직해진 잔디 양이 도저히 감당 안 되는지 자꾸만 토해내느라 영 진도를 못 뺀다. 이마와 등줄기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갈 즈음,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쫓아 나왔다. 그래. 내 새끼들 먹이는 일이 더 중허지. 오늘은 여기서 스탑. 나머지는 내일 마저 끝내주마.
고맙게도 짜파게티가 먹고 싶다는 아들내미의 요청에 합법적으로 불량스런 저녁을 차려내고는 맥주 한 병 꺼내어 홀짝 거리며 식탁에 앉았다. Bouncing czech (방방 거리는 체코 사람?)라고 병 겉면에 쓰여있는 필스너 라거(Pilsner lager:맥주의 한 종류)는 유독 씁쓸하기만 했다. 네 식구 둘러앉아 면발을 호로록 대며 지난한 일상의 특별할 것 없는 담소가 오고 갔다. 아이들과 남편이 먼저 식탁을 뜨고 나 혼자 남아 맥주 한 병을 다 비웠을 때 즈음, 무겁게 가라앉은 몸과 마음 위로 익숙한 설음이 내려앉는다. 2년반째 타국에 살며 수시로 찾아드는 그 느낌. 친해질 법 도한데 아무리 익숙해져도 그저 익숙한 ‘설음’ 일뿐인 그 느낌.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유명한 노랫말처럼 딱 그대로. 그것.
그런데 그 순간 문득 눈에 들어온 슈퍼마켓 봉지가 왜 그리 우스우리만치 이국적인 지. 빨래집게에 꽂혀 찬장 고리에 덜렁덜렁 매달린 그 슈퍼마켓 봉지가, 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그 연꽃 모양 로고가, 꼬부랑 영어로 쓰인 재사용 안내 문구가 꼭 내게 대답하는 것 같았다. 너는 지금 네가 한때 그렇게 설레며 꿈꾸던 멀고 먼 낯선 땅에 와 있다고. 지난하다고 표현하는 그 하루가 네가 그렇게 특별할 거라 꿈꾸던 그 하루라고.
뉴질랜드에 오기 전 한국 우리 집 부엌에선 종종 핸드폰 어플로 틀어놓은 뉴질랜드 라디오가 들렸다. 낯선 언어의 색다른 억양과 리듬에서 새로이 시작될 삶의 에너지를 느끼는 게 좋았더랬다. 그런데 뉴질랜드 우리 집 부엌에선 매일같이 한국 노래가 들린다. 오늘은 평소 좋아하던 독특한 감성의 한국 밴드 신보를 골랐다. 모 작가는 이 밴드의 음악을 먼 곳에서 부르는 듯한 노래라 표현하던데…... 그래서였을까. 문득, 먼 곳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먼 곳에서 오늘을 그리워할 내가. 그렇게 꾸준히 어리석을 내가.
덕분에 여전히 ‘설은’ 이 시간들이 한때 내가 열렬히 꿈꿔왔던 그곳이며 언젠가 반드시 그리워하게 될 순간임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