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가 불편한 외국인 엄마의 속내.
어제 월요일을 시작으로 또다시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다. 뉴질랜드는 한국과 달리 총 4학기 제도로 그만큼 잘게 쪼개지기 때문에 한 학기가 채 3달이 안 될 만큼 짧다. 학교와 유치원 및 플레이센터에 다니는 아이 둘 키우는 입장에서는 정신없이 칠렐레 팔렐레 하다 보면 어느새 한 학기 끝. 그렇게 몇 번 반복하면 1년이 다 끝. 이런 식이다 보니 1년이란 긴 시간도 매우 짧게 느껴진다.
일요일 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보다 더 일찍, 새 학기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부터 나는 툭하면 한숨을 내쉬곤 했다. 가끔은 심장이 도곤 도곤 거리고 가슴에 작은 자갈 몇 개 얹힌 느낌이었달까?
“아, 또 텀 시작이네……. 으아……”
“Life will begin again. A new term will be started soon.”
툭하면 혼잣말과 넋두리가 튀어나왔다. 지인들은 방학이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데 왜 나는 혼자 청개구리처럼 굴까. 막연히 투덜대기만 하자니 자꾸 에너지가 다운되는 것 같아 일요일 아침부터 노트북을 켜고 앉아 이 막연한 갑갑함의 실체가 무엇인지 적어 보기로 했다. 예상했던 것이긴 하지만 역시나 답은 외국인 엄마로서 살아내야 하는 사회생활의 스트레스였다. 특히 플레이센터(공동육아)에 나가서 뉴질랜드 현지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일이 여전히 내게 막연한 부담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하지 않았던가. 사실 백전백승까지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작전상 후퇴를 해야 한다 해도 적의 실체는 알아야 하기에 더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싫고 어떤 생각들이 힘든 건 지 내 안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가 사람들과 어울리며 힘들 때 1번, 2번, 3번, 4번 쭈우욱. 마음이 말하는 대로 막 적어내려가니 그제야 문제의 핵심 포인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또래 현지 엄마들과 일정 수준 이상의 발전된 인간관계를 맺기가 힘들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지만 거기서 오는 심리적 박탈감 때문에 자꾸만 내 자의식도 비대해져 편하게 행동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가? 그 이유는 사실, 말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 명확한 것이다. 깊은 대화를 이어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이들 관련된 가벼운 주제, 안부, 꼭 필요한 질문과 답 외에도 사람이 친해지려면 수다란 게 필요한 법인데, 나는 아직까지 수다가 안된다.(아마 오래도록 안 될 것이다.) 말이 부족하니 어떨 때는 자연스레 감정 표현이 커져서 대화에 적극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 두 번 상대에게 내 의도가 전달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든다. 그렇게 적당한 피치와 속도로 이어져야 재밌을 사적인 수다에서 내 어눌한 옹알이가 껴들면 긴장감이 훅 쳐지기 때문에 자연스레 나는 뒤로 빠진다. 자발적으로 또 상대방도 인지하지 못하는 타의에 의해. 슬프지만 그게 내가 겪는 현실이다.(그래요. 그렇습니다.) 가뜩이나 이방인이라 서로 낯설고 친밀도가 낮은데 대화마저 자유자재로 안되니 정말 현실적으로 끊기 쉽지 않은 고리라 해야 할까?
그런데 과연 이게 전부일까. 오늘 아주 맘먹고 더 내밀하게 까보이자면 이민 3년 차가 되어가는 지금, 나는 그게 영어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냥 다수인 그들에겐 나와 친해져야 할 이유가 별로 없는 게 아닐까. 인간이란 게 본디 이기적인 존재인데 필요 없는 일에 에너지를 쏟지 않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 아닐까. 단순한 호의가 담긴 대화는 나도 충분히 하고 산다. 인사하고 안부 묻고 등등. 신경써서 나를 챙겨주는, 고마운 사람들도 많다. 문제는 그 이상이 안된다는 것. 그게 가끔 좀 서글프단 것. 지금 여기서 친구가 필요한 건 나 하나뿐이라는, 그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월요일, 공동육아에서의 새학기 첫 날을 보내고 돌아와 남편에게 하소연을 했다.
“아 힘들어. 진 빠져. 사람들이랑 왜 이렇게 어울리기 힘든 걸까?”
“말했잖아. 그건 우리가 더 다가가는 거 말곤 방법이 없어.”
“아니, 나는 오늘 그러고 싶은 기분이 아닌데 억지로 행동하고 싶지 않았어. 밝게 웃을 기분이 아닌데 밝게 웃고 싶지 않았다고. 난 내 모습이 아닌 모습으로 살고 싶지 않아.”
“그러면 너는 오늘 너답게 살아서 좋은 거네.”
“(벙찜)...... 하지만 다가가지 않으면 계속 어울릴 수 없을 텐데? 그건 또 그것대로 싫다고.”
“그래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거니까 좋은 거잖아. 전부를 다 가질 순 없지만 적어도 절반은 좋은 거잖아. 먼저 다가가면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채워져서 좋은 거고 안 다가가면 너답게 살고 싶은 마음이 채워져서 좋은 거고. 뭘 해도 절반은 좋은 거네.”
남편은 가끔 이렇게 황당할 정도로 호쾌한 답을 내놓곤 한다.
“흥. 그렇네.”
핵심을 찔리고 나니 민망해서 콧방귀를 뀌고는 돌아섰다. 남편의 말을 듣고 나니 이 모든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는 상황들과 감정들이 선택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내가 좋아하던 말인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라는 말은 바꿔 말하면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만큼 하고 싶을 때만 하면 된다’는 말이란 걸 깨달았다.
이민생활도 내가 계속 여기 살고 싶어서 유지하는 것이다. 언제든 싫어지면 떠나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뭐든 억지로 될 일은 없다. 스트레스받아가며 살 필요 있나? 결국 내가 좋아서 사는 건데 말이다.
지금 나는 내가 살기로 선택한 새로운 세상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단 걸 안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안타깝게도 나는 타고나길 그런 일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라, 엄연히 노력하는 중이다. 그러니 반대로도 공평해야 한다. 까짓 하기 싫음 하지 말아야 한다. 억지로 강요하는 감정이나 행동은 노동이다. 노력과 노동은 너무나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책 <대담하게 맞서기>의 저자 브레네 브라운은 말했다. 사람들은 ‘Belonging’(소속감)이라는 개념을 ‘fit in’(맞춰 들어가야 한다)이라는 개념과 혼동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Not fit in’하며 본인 모습 그대로 소속되는 것이 진짜 Belonging이지 나를 바꾼다면 그것은 참된 Belonging이 아니라는 것이다.
관두고 싶다면 그만두는 것도 용기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 지 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더 시도해보는 것. 그렇다면 그것이 나의 모습일지니...... 나로서 살고 있으니 이것 참 행복한 인생 아닌가!
by 라맘.
블로그와 브런치에 본격 이민 에세이를 쓰고 유튜브 채널 [뉴질랜드 다이어리]를 운영합니다.
네이버 블로그 : https://blog.naver.com/lalamammy
유튜브 [뉴질랜드 다이어리] : https://www.youtube.com/channel/UCtS-ZciZCl-dOP2jf_p9xi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