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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맘 May 16. 2019

Aim high

찰나의 순간들을 모아놓고 보면 결국 코미디.


매주 한 번씩 화상채팅으로만 만나던 J와 처음으로 직접 만나 카페 데이트를 했다. 영어 회화 실력을 키우고 싶어 원어민 대화 상대를 찾고 있다고 지역 페이스북 페이지에 공고 글을 올렸더니 당시 뉴질랜드 이민 6개월 차였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그녀가 흔쾌히 댓글을 달아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특별한 인연으로 스승과 제자 겸 친구가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모니터와 이어폰을 통해 서로의 근황을 묻고 시시콜콜한 일상을 이야기했다. 아이들 교육 이야기를 나누고 주부의 삶을 푸념했으며 가끔 뉴질랜드 흉도 봤다. 반대로 이 곳 삶이 주는 혜택에 대해 함께 감탄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새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져 갔다. 


삼십 분 정도 차를 타고 달려 그녀가 소개해준 카페에 도착하고 보니 아트 갤러리와 예술 협업 공간을 겸한다는 작은 동네 카페였다. 참 예뻤다. 너무 맘에 들었다. 먼 길, 운전하는 수고를 들여서라도 종종 찾게 될 것 같은 곳이었다.  


항상 조용한 곳에서 일대일로 그녀의 말에만 집중해가며 대화를 나눴는데 오늘 처음, 주변 소음과 함께 대화를 하려니 집중이 흐려지고 잘 안 들릴 때도 많았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그녀의 생생한 표정과 큰 제스처를 보게 되니 왠지 더 정감이 갔다. 이런 사람이었구나. 내 생각보다 더 편안하고 쿨하면서도 따뜻한 사람. 과한 게 없어 부담스럽지 않고 꼬인 구석 없이 솔직해서 적당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은 그녀를 보며 40대가 될 내 모습을 그려본다. 나도 그렇게, 너무 쿨하지도 뜨겁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로 주변이 들을 편안하게 감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단 생각을 한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서로의 호구조사를 하다 문득, 그녀의 새로운 꿈에 대한 이야길 나눴다. 직장생활을 십 년 넘게 해왔지만 그 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이제는 어린아이들도 셋이나 있으니 다른 일을 찾아볼까 싶다던 그녀. 홀홀 단신 이민 온 우리 같은 독박 육아 엄마들은 아이들 육아를 도와줄 주변 친지가 없으니 자연스레 아이들이 학교나 유치원에 가 있는 시간 동안만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를 먼저 생각해보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선생님을 선택지에 올려놓곤 하는데 그녀 역시 지금 그런 생각을 해보는 중이라 했다. 그런데 그 이야길 듣자마자 튀어나온 나의 본심이 참 쩨쩨했다. 


"나도 너처럼 영어가 가능하다면 유치원 선생님도 한 번 도전해보고 싶긴 한데…..." 


그녀가 부럽다는 뉘앙스가 드러나는, 악의는 없다 해도 약간의 시기가 섞여 들어간 말이었다.  그녀는 내게 조심스레 권했다. 


"아 정말? 그러면, 지금 너희 둘째 딸까지 학교에 가고 나면 너도 시간이 생기잖아. 그때 보조교사로 한 번 취업해보면 어때?" 


나는 조금 망설이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영어가 유창한 현지인들이 이미 충분한데 굳이 나처럼 영어가 어설픈 이민 1세대를 보조교사로 쓸 이유가 있을까? 나는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해. 솔직히." 


이어서 우물쭈물거리며 덧붙였다. 


"한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이 선택하는 직업은 따로 있어. 나도 아마 적성에 상관없이 그런 일들을 하게 될 것 같아." 


J는 뭐 그런 엉뚱한 소리가 있냐는 듯 황당한 얼굴로 나를 다그쳤다. 


"Hey, why are you~ Aim high~" 


나는 씁쓸한 얼굴을 급하게 감추며 웃어넘겼다. 즐겁게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혼자가 된 나는 까닭 모를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엥?? 이건 뭐지? 나조차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아니 너무 재밌게 잘 놀고 와서는 갑자기 왜??? 


그때, 계속해서 귓가를 맴도는 목소리가 있단 걸 알아챘다. 


에임 하이.

에임 하이.

에임 하이. 


나는 문득 눈물이 주룩 흘렀다.     


그냥, 나에게 미안했던 것 같다. 꿈 많던 십 대 소녀의 말간 얼굴이 떠올라 왠지 미안했다. 다부진 두 어깨로 당당하게 서 있던 교복 차림의 소녀가, 그 선명한 표정이 스쳤다. 마치 져버려선 안 될 약속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  


닳아버린 날카로움, 뭉툭해진 심지, 잠들어버린 뜀박질...... 


어른이니까, 엄마니까, 어리지 않으니까, 외국인이니까, 이게 현실이니까. 

흔한 세상의 잡음에 일순간 무뎌져 버린 내 영혼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또 한 편, 나는 그 말에 설레었던 것도 같다. 


에임 하이.

에임 하이.

에임 하이. 


J의 그 한마디가 반복해서 내 귀에 들릴수록 꼭 목캔디를 삼킨 것처럼 목구멍부터 명치까지가 화해졌다. 응원이었다. 그녀와 헤어지며 나눈 포옹은, 그녀의 한 마디는 내게 분명 가치 있는 응원이었다. 


그래.

에임 하이.

누가 뭐래도 너 자신을 놓지 마.

너는 그냥 너야.

너로 사는 거야.        












내 삶은 오늘도 코미디다. 뭐라도 웃기면 좋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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