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서 절대 그것만은 빼앗지 말라.
저녁 설거지까지 싹 끝낸 뒤 홀로 샤워하며 하루의 마무리를 즐기고 있는데 아들이 급한 일 있다는 듯 문을 벌컥 열며 뛰쳐 들어왔다.
“엄마 엄마!”
“응?”
“그거 알아요? 나 이제 두 개 알아요!”
“응?”
“그 그 두 개까지 할 수 있어요. 그~그~끄! 끄~아~까! 까까~까치! 나 이제 까치도 할 수 있어요!”
아~ 다짜고짜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그 두 개가 기역(ㄱ) 두 개를 말하는 거구나. 오늘 드디어 첫 쌍자음을 배웠구나. 쌍기역(ㄲ)을 배웠단 소리구나. 나는 신이 난 아들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깨를 들썩이며 재빨리 다시 한글 공부하던 테이블로 돌아가는 아들내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맘속으로 중얼거렸다.
‘빼앗지 말아야지. 저 즐거움을 나는 절대로 빼앗아선 안된다.’
내 아들은 한국 나이로 8살이지만 아직 한글을 모른다. 이제야 서서히 떼고 있다. 외국에 살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영어를 먼저 읽고 쓰는 걸 배운 지 어느덧 2년이 지났다. 우리가 살고 있는 뉴질랜드는 만 5세가 되면 학교에 다녀야 하기 때문에, 아이가 학교에서 영어를 먼저 배우기 전에 한글을 서둘러 가르쳐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평소 갖고 있던 육아 방침대로 7살 이전엔 한글을 가르치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알파벳도 모르는 채 타국 생활을 이제 막 시작한 아이에게 한글 공부라는 또 하나의 짐을 던져주고 싶지 않았던 것도 컸다. 아이는 두 가지 언어체계를 동시에 확립해나가느라 이미 충분히 제 몫을 다 해 열심히 살고 있었을 테니.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아이는 영어책을 제법 잘 읽고, 자기만의 스토리를 꾸며내 영어로 쓰기까지 할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는 저녁마다 엄마 아빠가 읽어주는 한글책의 분량이 너무 짧다고 늘 아쉬워했다. 재미있는 한글책을 더 많이 읽고 싶은데 저녁마다 엄마 아빠는 녹초가 되어 빨리 자야 한다고 아이를 침대로 들여보내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느낄 즈음,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짬짬이 한글 공부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거들기 시작했고 아이는 작년 한국 여행 때 사 온, 한 달이면 한 권을 끝내고 세 달이면 한글을 완벽하게 떼게끔 해준다는 한글 교재를 지금 1년이 다 되어가도록 쉬엄쉬엄, 느릿느릿, 풀어가고 있다. 달팽이처럼 아이를 키우는 내 방식에 맞춰 고스란히 엄마 바람대로 커 준 자랑스러운 아들이다. (웃어, 울어? 하하;)
까먹을만하면 한 번씩, 잊을만하면 한 번씩. 하루 한 글자씩. 그렇게 천천히 해 나가는 중인데 드디어 오늘 첫 쌍자음까지 진도를 뺐다. 아이는 감격했다. ‘내가 기역(ㄱ)을 두 개나 할 수 있다니!’ 나는 그런 아이를 보며 다른 이유로 감격했다. 아이 스스로 배움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내가 이만큼 잘 기다려주었다니! 아.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했던가. 남들은 세 달이면 끝낸다는 저 한글 워크북 세트를 들고, 몇 달째 모음 ㅗ와 ㅜ를 끊임없이 헷갈려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남몰래 고구마 백 개씩 얼마나 삼켜왔던가…… 하지만 늘 그렇듯 나의 아이는 기다리면 언젠가 천천히 해내는 아이. 그리고 나는 그런 아이를 기다려줄 수 있는 엄마. 나는 그런 나에게 장하다고 스스로 등을 토닥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좀 더 일찍 아이를 다그쳤다면 쌍기역을 작년에 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쌍기역 하나에 세상 다 가진 듯 환해지는 아이를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의 육아는 이렇듯 늘 새로운 만남이다. 아이 둘이 제각각 새롭고 아이의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나는 매일 아이의 다른 표정을 만나고 아이가 뿜어내는 새로운 에너지를 만끽한다. 나의 아이는 스스로 빛을 내고 변화무쌍하게 자라나는 존재이다. 그 덕분에 나 역시 함께 자라나는 존재로 이 땅에 발붙이고 서 있을 수 있으니 그저 오늘도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