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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맘 Jun 16. 2019

우리의 오늘은 저축할 수 없으니까.

엄마. 비 와요. 오늘은 걸어가면 안 돼요?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든 밀당이 주특기인 이 곳 생활이 그렇듯 쏴쏴 세차게 쏟아졌다 잠시 멈췄다 다시 쏟아지길 반복하는, 짓궂은 비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힘찬 폭포 소리와 어스름한 침묵 그 사이. 반복되는 소음과 고요, 그 리듬감 있는 운율 어디메쯤에서 서서히 해가 떠올랐다. 여전히 하늘은 회색이지만 그 무엇이 태양이라는 강력한 힘을 무시할 수 있으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어김없이 오늘도 제 역할을 다 하는 존재. 덕분에 비로소 주변의 모든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침이다. 하루가 시작된다.


해가 쨍하고 파란 하늘을 보여주는 뉴질랜드의 청량한 날씨를 가장 좋아하긴 하지만 겨울이 되어 매일같이 비가 쏟아지고 스산하기만 한 날씨도 그럭저럭 그것만의 맛이 있다. 사람도 저마다의 개성이 있어 모두가 같은 사람을 좋아할 수 없는 것처럼 날씨도 풍경도 있는 그대로의 개성을 존중할 수 있다면 우리는 1년 내내 조금은 더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매일같이 나서는 현관문 앞에 서서 오늘은 운동화 대신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코발트블루 장화를 집어 들었다. 딸내미도 파스텔 분홍 바탕에 신데렐라 얼굴이 그려진 장화를 집어 든다. 우산도 꺼내어 달라기에 뽀로로 캐릭터 우산을 꺼내어주곤 나 역시 우산을 꺼낼까 하다가 왠지 거추장스러워 그냥 등산용 방수 점퍼를 꺼내 뒤집어썼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곤 딸내미 역시


 “나도 방수 점퍼 입으면 안 돼요? 플리즈~”


방수 점퍼에 장화, 그리곤 좋아하는 우산까지. 꼭 비 내리는 날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모든 걸 갖춘 차림. 어딘지 모르게 과한 그 모습에 귀여운 설렘마저 느껴진다. 평소처럼 차에 시동을 켜기 위해 차키를 집어 드는데 다시 한번 들려오는 딸내미의 간절한 목소리.


“오늘은 걸어가면 안 돼요? 플리즈~”

.

.

.

아…… 지금 비 장난 아닌데…...



딸내미의 유치원 가방에 도시락 가방까지 어깨에 둘러메고 행여나 젖을까 두 팔 가득 꽉 끌어안고는 종종걸음으로 앞서가는 작은 뒷모습을 따라잡아 본다. 우리 앞을 지나치는 열두어 살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는 우산도 장화도 방수 잠바도 없이 그냥 평소와 같은 차림으로 유유히 걷는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언제 봐도 놀라운 풍경. 한국에서 저러고 다니면 중2병이라도 걸렸나 보다고 생각했겠지. 어른이라면 이별이라도 했나 싶어 아니꼽게 혹은 안쓰럽게 쳐다봤겠지. 나 어릴 때 즈음부터 산성비라는 경고가 나오기 시작해 비는 맞으면 안 되는 것, 피해야 하는 것, 머리에 맞으면 대머리가 되는 것이라고 늘 배워왔기에 비 오는 날, 빨래를 널어놓아도 그저 다시 말리기만 하면 되는 이 곳의 인식이 처음엔 참 낯설었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비를 맞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혹자는 빗속을 걸어가며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기도 한다. (으잉?)


 비가 이렇게 오래도록 자주 오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내 기준에서 바라본 뉴질랜드의 도로 배수시설은 참으로 열악하다. 덕에 비가 이토록 많이 쏟아지는 날이면 길가 곳곳에 크고 작은 웅덩이들이 생기곤 해서 우리 딸에겐 더없이 즐거운 놀이터가 되어준다.


찰박 찰박- 척척. 찰박 찰박- 척척.


아까 지나간 여학생 말고는 모두가 차를 타고 쌩쌩 지나가는 거리를 나랑 딸내미 단둘이 유유자적 걷고 있노라니 이 모든 고요와 설렘이 꼭 우리만 아는 것 같아서 괜히 우쭐하다. 빗방울이 우산에 부딪혀 만들어내는 지글지글 소리에 가끔씩 더해지는 종알종알 청명한 새소리, 아이 장화가 바닥의 작은 웅덩이를 지나갈 때면 찰박찰박 찰진 소리까지. 단 한순간도 침묵인 적이 없는 풍경 속을 걷고 있는데 왜 나는 이토록 고요하다 느낄까.


눈에 보이는 것들은 또 어떻고. 미묘하게 채도가 다른 무채색들로 그라데이션 된 뭉게구름이 타임랩스를 돌린 것처럼 빠르게 움직인다. 그 신비로운 하늘 사이로 유유히 날아가는 까만 점 같은 새 몇 마리, 온몸 가득 습기를 머금는 키 작은 나무들의 생기. 무엇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는 이 시간. 평소 멈춰있다 생각되던 많은 것들이 나 여기 힘차게 살아있다고 앞다투어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는 느낌.  새삼 걸어가자고 졸라댄 아이가 기특하고 고마워진다.


만약 아이의 걸어가자는 청을 무시했다면 나는 결코 이 순간의 충만함을 맘껏 만끽하지 못했으리라. 조금 귀찮다고 너의 목소릴 외면했다면, 한시라도 빠르게 널 유치원에 내려다 놓을 순 있었겠지만 그래 봤자 결국 그 지루한 어른의 세계에 더 빨리 들어앉아 10분을 허비했겠지. 그것이 허비라곤 꿈에도 생각 못하곤. 내일을 위한 저축이라 믿으며. 우리 모두를 위한 거라고 위로하며. 더 빨리 더 많이 무언가를. 그런 척.


딸아. 하지만 나는 네 덕에 오늘 이런 걸 깨달았어. 시간과 행복은 저축하는 게 아니라고. 오늘 아무리 아껴봤자 그것이 내일 두 배가 되어 돌아오진 않는다고. 오늘의 시간과 행복은 당장 그 자리에서 써버리는 게 최선이라고. 그것들엔 절대로 이자가 붙지 않는다고. 지금 놓치면 그걸로 끝이라고. 그래서 찾아온 그 순간, 잡는 자에게만 유효한 것이란 걸 말이야.


그래서 나는 늘 입버릇처럼 네게 말하곤 하는 “좀만 이따가. 이것만 끝내고. 나중에 꼭 해줄게.”라는 말을 앞으로는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어. 얼마나 지켜질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볼게. 너와 나의 시간은, 우리가 함께 나눌 행복은 아끼는 게 아니니까. 우리의 오늘은 저축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오늘 너의 작은 뒷모습을 영원히 기억하고프다. @유치원 가는 길, NZ




by 라맘.

블로그와 브런치에 본격 이민 에세이를 쓰고 유튜브 채널 [뉴질랜드 다이어리]를 운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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