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인해 소환되는 기억들 그리고 다시 쌓여감에 대하여
첫째 아이 하교할 때 학교 앞 건널목에 서서 기다리고 있노라면, 아이 학교 선생님이 우릴 보고 외치곤 했다.
"너희가 학교에서 가장 빨리 집에 가는 사람들이겠는데?"
그 말은 분명 사실이다. 우리 집은 정말 학교 코앞이다. 집 앞 담으로 학교가 건너다 보일 정도니 말해 무엇하랴. 이 집을 처음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엔 이 부분도 꽤 컸다. 아이가 학교에 대한 물리적, 심리적 거리 모두 가깝게 여길 수 있을 것 같았고 금세 통학도 스스로 할 수 있을 테니.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 친구들이 오며 가며 참새 방앗간처럼 편하게 들러 아이와 놀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지금 우리 집은 플레이 데이트를 하기에 최고의 조건을 자랑한다. 하교 후 아이들이 저들끼리 우리 집으로 바로 올 수 있으니까. 부모가 일일이 데려다주는 수고를 안 해도 되니까 한 번 우리와 안면을 터놓으면 이보다 더 편할 순 없으리. 그래서 친구들의 방문이 종종 있는 편인데, 오늘도 아침부터 띠리링 메시지가 울려왔다.
오늘 정전 때문에 학교가 갑자기 문을 닫는대. 나 지금 일하러 가는 길이거든.
일하러 갈 때, 우리 애도 데려가면 되긴 하는데, 얘가 혹시 너희 아들이랑 놀 수 없냐고 물어서. 연락해봐.
아침에 아이들 등원시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모든 불이 일순간 꺼졌다. 오늘 전국적으로 비바람 소식이 있더니 또 갑작스러운 정전이다. 우리 동네는 오래된 동네다 보니 전깃줄이 아직도 전봇대에 걸려 지상으로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바람이 심하면 1년에 몇 번씩 정전이 나곤 한다. 뭐 가끔 있는 일이니 당황하지 않고 평소대로 도시락 싸서 아이들을 내보내는데 집을 나서자마자 아이가 뒤돌아 달려오며 "노스쿨!! 노스쿨 투데이!!!" 만면의 미소를 띤 얼굴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맞벌이 가정에서 자라는 아들 친구는 급작스레 엄마 일터에 따라 나가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당근. 좋지. 우리 집에 데려다주고 일 가.
이렇게 적어 답장을 보냈다. 이 친구 엄마는 나의 엄마와 직업이 같다. 간호사. 지금도 현직에 있는 우리 엄마는 나 어릴 때도 맞벌이로 일을 했기 때문에 나 역시 급하게 유치원을 못 갈 때엔 마땅히 돌봐줄 사람이 없어 가끔 엄마 따라 병원에 나갔다. 젊은 간호사 이모들이랑 놀기도 하고 빈 병실에서 티브이를 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거기서 이모들로부터 시계 보는 법도 배웠고 환자들에게 선물로 들어온 커다란 캔에 들은 색색깔 알사탕이나 귤 속살이 알알이 씹히는 쌕쌕이 주스 따위를 까먹으며 무료함을 달래곤 했는데...... (쌕쌕 모르시는 분들이 계시려나?) 아이 친구 엄마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그 시절의 정겹고 씁쓸한 추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출근 전, 아이를 우리 집에 들여보내며 이놈의 학교 너무 자주 맘대로 쉬지 않냐고 푸념하는 친구 엄마를 보며 너무 젊었던 우리 엄마의 얼굴을 그려본다. 나도 맡아줄 이웃집이 있을 땐 병원에 따라가는 대신 그 집 문턱에 서서 엄마의 고맙다는 말과 약간의 난처, 하지만 진심 어린 고마움이 빚어낸 환한 미소를 보곤 했는데...... 아이를 맡아주어 정말 고맙다고 연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 시절 우리 엄마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이 낯설고 어색한 장면의 중첩이라니. 이젠 어딘지도 잊었을 만큼 오래된 기억 속 낡은 문턱과, 수줍음 많던 소녀들과, 두 젊은 아주머니의 정겨운 한국말 대화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우리 집 문 앞에서, 장난기 가득한 소년들로,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두 아줌마들의 어색한 영어 대화로 이어지는 순간.
그 시절 빛바랜 기억은, 생활의 지난함이 고스란히 묻어나 펄떡펄떡 뛰는 화려한 생기는 비록 없지만, 봄볕이 어딘가에서 스며 드는 듯 왠지 따스하게 남아 있다. 오늘 요 녀석들에게 주어졌던 하루 역시 그렇게 남기를 바라본다. 우리 집 거실에 나란히 엎드려 종알대는 두 사내애들의 뒷모습에 마음이 조금 일렁인다.
"전에 내가 우리 엄마 간호사라고 얘기했지? 나도 어릴 때 우리 엄마 일하는 데 가끔 따라가곤 했어. 그래서 그게 어떤 건지 잘 알아."
"아마도 지루할 거야."
"당연하지."
내일도 학교가 쉰단다. 선생님들 단체로 파업하는 날 이랬는데. 친구 엄마에게 메시지를 하나 더 날려본다.
괜찮으면 내일 내가 애들 데리고 어디 좀 나가서 놀리고 점심 맥여서 들어올까 하는데 어때? (찡긋)
사람 사는 게 뭐 별거랴. 함께 잘 살면 좋은 거지. 자꾸만 삶의 소망이 소박해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