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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맘 Jun 08. 2019

그녀의 좋아요는 나를 성장시킨다.

뉴질랜드 이민 3년차, 바닥쳤던 자존감이 다시 솟는 이유.

지금 사는 마을의 플레이센터(공동육아)에 시험 삼아 처음 나가봤던 날, 아이는 플레이도우 테이블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였었다. 거기 앉아 둘이 쪼물락 쪼물락 밀가루 플레이도우를 주무르며 앞에 앉아 있던 처음 보는 한 엄마와 자기소개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난다. 한눈에 봐도 왠지 강단 있어 보이는 인상의 그녀는 내가 한국에서 왔단 이야길 듣자, 자기가 최근에 젊은 탈북민 여성 박연미의 책을 읽었다며 화제를 꺼냈다. 나 역시 평소 책 읽기를 워낙 좋아하기에 오래간만에 듣는 독서 이야기가 반가웠다. 게다가 이 뉴질랜드 시골에서 박연미의 책을 읽는 사람이라니. 사실 토착민들끼리 많이 모여사는 시골일수록 우물 안 개구리 되기가 쉬운 게 사실인데, 세상 밖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라니,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첫인상은 내게 퍽 호감이었다. 


그 후 그녀는 넷째 임신과 출산 그리고 정신없는 위의 세 아이 육아로 늘 바빠 보였고 나와 겹치는 동선이 많지 않아 우리는 특별히 교류할 일이 없었다. 다만 가끔 마주칠 때마다 먼저 내 이름을 기억했다 정확히 불러주는 모습에서 자연스레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배려심, 품격 같은 걸 은근하게 느꼈을 뿐. 


최근 넷째 출산 후, 짧은 몸조리를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한 그녀와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는데 이런저런 근황 토크를 하던 중, 그녀가 나와 내 남편의 이름을 헷갈렸는지 반대로 바꿔 부르는 작은 실수를 했다.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라 전혀 개의치 않고 잊었는데 그녀는 그게 또 갑자기 생각났는지 후에 메시지를 보내왔다. 미안하다고. 다음에 자기가 그런 실수를 또 한다면 그땐 꼭 말해달라고. 


뜬금포 우리 아들 사진. @Taranaki, NZ


그리고 어제 다시 마주친 그녀가 우리 부부를 보더니 대뜸 이런 말을 건넨다. 


“나 페이스북에서 너네 유튜브 영상 봤어. 당연히 무슨 말인 지 하나도 못 알아 들었지. 그냥 중간에 애들 럭비 하는 모습 나오기에 ‘아 럭비 이야긴가?’했어. 하하하. 그리곤 그냥 좋아요를 쿨하게 눌렀지. 정확한 내용은 뭔지 모르지만 그냥 너희가 하는 일이라면 아마 좋은 걸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눌렀어. 하하하.”


가볍게 던진 그 말이, 그 사소한 한 마디가 나는 참 좋았다. 오래도록 가슴에 울렸다. 뭔지 몰라도 너희라면 좋은 걸 거야라는 그 말이 내게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 지, 우리가 누구인지 안다는 말처럼 들려서 참 고마웠다. 


처음 이민 와서는 나도 모르게 위축되고 주눅 들어 보내는 하루하루가 많았다. 키위(뉴질랜드 현지인)들을 만날 때는 물론이고 돌이켜보면 비슷한 처지의 이민자들에게도 상처 받곤 했다. 겨우 나보다 몇 년 더 앞서 왔다고, 나보다 영어 좀 더 잘한다고 은근히 나를 대화에 껴주지 않는 무례한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 나 혼자 자격지심에 그들과 나를 비교하며 혼자 굴을 파고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금 내가 깨달아가는 건 내 영어가 어떻든, 내가 어디 출신이든, 돈이 많건 적건, 나이가 많든 적든 정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사람 그 자체라는 것이다. 한두 번 보고 말 사이라면 단순히 처음 알게 되는 정보들이 판단의 척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사람이란 게 여러 번 경험하다 보면 결국 언어나 배경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의 진심이나 됨됨이가 어떻게든 드러나게 된다는 걸 이젠 안다. 


그래서 나는 예전처럼 자주 위축되거나 주눅 들지 않는다.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거나 이불 킥하지 않는다. 내가 오늘 어떤 말을 어버버 거렸건 누가 나를 무시했건, 결국 내가 나인 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니까. 나 스스로가 지금 이렇게 떳떳하고 당당하게 열심히 살고 있는데 누가 날 어떻게 보건 알게 뭐람. 결국 언젠가 나는 나로서 드러나게 마련인 걸.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는지 그 모든 것들은 내 행동이나 태도에서, 표정에서 결국 다 드러나게 되어 있는 걸.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그런 것들은 결코 감추거나 속일 수 있는 게 아닌걸. 그래서 나는 조금 힘든 오늘이 있더라도 불안하지 않다. 내일은, 모레는, 언젠가는 더 좋아질 게 분명하니까. 나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무지한 거지 내가 못난 게 결코 아니란 걸 나는 아니까. 나는 나를 믿으니까. 


처음 이민 와서 보냈던 1년은 자존감이 바닥을 찍는가 싶을 정도로 불안정해 자존감 관련 책을 스스로 찾아볼 정도로 힘든 시기를 지나기도 했는데 돌이켜보니 결국 지금 내 자존감은, 한국에서만 살았을 때보다 더욱 높아졌다. 이래서 사람은 변화, 도전, 실패의 경험이 중요한가 보다. 물론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느냐가 관건일 테지만. 성공하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잘’ 실패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던 어느 책의 문구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 지금  ‘잘’ 실패하고 있는 걸까? 


이번엔 똥깡아지 딸 @Wairarapa, NZ


그녀와의 또 다른 대화 한 토막이 문득 떠오른다. 


“너희 딸, 라양말이야. 최근에 완전 뭔가 바뀌지 않았니? 엄청 자신감 있어지고. 여기에 적응 다 끝낸 것 같아. 이제.” 


그녀의 말에 나는 다 주변 엄마들이 많이 도와줘서 그렇다고, 고마움을 전하니 그녀가 단호하게 대화 톤을 바꾸며 내게 말했다. 


“그건 네가 그만큼 플레이센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을 맡아서 잘해줬기 때문이야.”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내 진심이 이들에게 가 닿고 있구나. 힘들어도 도망치지 않길 참 잘했다.’ 덕분에 나도 그동안 한 번도 꺼내어 본 적 없는 속내를 그녀에게 담담히 말하게 되었다. 


“음….. 있잖아. 사실. 그건 태도에 관한 거야. 나는 우리 부부가 이 사회를 향해 보이는 태도, 그 자체를 우리 아이들이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배운다고 생각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좀 더 적극적으로 부딪히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거야.” 


사실 정말 친하지도 않은 사이인데…… 몇 번 만나본 적도 없는데…… 나도 모르게 꺼내어진 속내가 어설픈 단어들로도 잘 전달되었을까? 






‘너희들이 하는 일이라면 좋은 거겠지.’라는 말과 함께 오늘도 내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꾸욱 눌러주는 그녀의 따뜻한 신뢰가 나를 더욱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들게끔 한다.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역시 사람의 마음이다. 우리는 서로 믿어주는 만큼 성장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제 아무리 다 큰 어른이라도 말이다. 





by 라맘.


블로그와 브런치에 본격 이민 에세이를 쓰고 유튜브 채널 [뉴질랜드 다이어리]를 운영합니다.

네이버 블로그 : https://blog.naver.com/lalamam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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