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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맘 Mar 06. 2019

아직, 설렘.

뉴질랜드 무작정 이민 2년 차, 시시한 일상일지라도.

오랜만에 운동장에 나가서 걸었다. 간만에 바라다 보이는 탁 트인 풍경이 시원했다. 적당히 푹신하리만큼 무성한 늦여름의 잔디는 이따금씩 제멋대로 뿌려진 제초제의 등살에 군데군데 빳빳하기도 했지만 그 촉감이 오히려 현실적이라 좋았다. 몽글몽글 순두부처럼 퍼져 있는 하얀 구름과 스카이 블루가 왜 스카이 블루인지 실감하게끔 하는 하늘의 빛깔, 저만치 내려앉으며 좀 더 가까이 세상을 감싸 안는 오늘의 해. 주변 공기의 무게까지 붕 뜨며 마치 조금 먼 어느 곳엔 가 서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려는 걸, 얄팍한 러닝화 밑창으로 전해지는 마른풀의 거친 결이 다시 이곳으로 날 붙잡아오곤 했다.

보통 산책할 땐 이어폰으로 음악을 크게 듣곤 하는데 오늘은 몽롱한 저녁에 취해 그것마저 귀찮아져 버렸다. 동시에 약속이나 한 듯이 사방팔방 귀퉁이 저 발치서 왕왕 짖어대는 개소리가 들렸다. 재밌어서 더욱 귀를 기울이니 어디서 울어대는지 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조잘조잘 가볍게 날아다니는 새소리들이 들렸고 그 아래로 마치 하나의 배경음악처럼 지속되는 매미 울음소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합주곡, 그 안에 내가 걷고 있구나. 스스슥 스스슥. 풀밭 스치는 발자욱소리와 머릿속으로 제멋대로 떠드는 나의 잡념들도 또 하나의 리듬이 되어 같이 울고 있구나.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아직 이곳에 설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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