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 아빠가 발견한 새로운 세계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안일을 후딱 마무리한 뒤 집을 나섰다. 8월 늦더위라 공기는 후덥지근했지만, 바람이 불면 견딜 만한 수요일 오전이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국립현대미술관.
휴직 후 새롭게 생긴 취미가 바로 '미술관 가기'다.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은 정부가 운영하는 문화가 있는 날. 영화관, 공연장, 박물관, 미술관, 문화재, 스포츠 시설 등 전국 2천여 개 문화시설을 할인이나 무료로 즐길 수 있다.
사실 나는 전시와 문화생활에는 문외한이었다. 연애 초기 데이트할때만 몇번 갔지만 왠지 돈이 아깝고 이해하기 난해하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발을 들여보니 시간과 약간의 용기만 있으면 충분히 가까워질 수 있는 세계였다.
취직 후에는 경제적 여유는 생겼지만 시간이 없었다. 굳이 연차를 써가며 미술관을 찾는다는 건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육아휴직 후 나만의 시간이 많아지고 이런 문턱을 완전히 낮춰주었다. 아이를 돌보는 것이 주된 임무지만, 그 사이사이 주어지는 자투리 시간이 나를 전혀 다른 풍경으로 이끌어주었다.
평일 낮의 문화시설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더운 여름이었지만 일부러 한 정거장을 더 가서 내렸다. 경복궁을 잠시 둘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울 사람이라면, 아니 한국인이라면 다소 뻔한 곳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평일 낮의 경복궁은 낯설게 다가왔다. 외국보다 더 외국 같았다. 관광객의 대부분이 외국인이었고, 한국인은 오히려 드물어 보였다.
그 풍경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일상도 한 발짝 비켜 서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 나에게 주어진 이 휴직의 시간도, 마치 그렇게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라는 선물인지 모른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난 김창열 화백의 회고전은 완전한 충격이었다. 이름도 몰랐던 작가였는데, 그의 삶 자체가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었다. 20세기 초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세계를 떠돌며 가난한 예술가로 살아온 여정.
특히 그의 대표작인 물방울 연작에 깊이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기법적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물방울의 굴절, 반사, 왜곡을 모두 표현해내는 정교함에 감탄했다.
물방울이라는 소재는 사실 그림으로 표현하기가 매우 어려운 대상이다. 빛의 굴절과 반사, 그로 인한 왜곡, 물방울 밑에 있는 형태들의 확대와 변형 등을 모두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물방울의 형태는 매우 비정형적이다. 완벽한 원형을 가진 물방울은 거의 없고, 어떤 것은 흘러내리고 있고, 어떤 것은 찌그러져 있고, 어떤 것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의 물방울들을 정교하게 그려내는 것 자체가 대단한 기법이었다. 그런데 작가는 이 물방울들을 그리면서 6.25 전쟁 때 죽어간 동창들을 생각했다고 한다. 각각의 물방울이 잃어버린 친구들의 영혼을,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온 모든 이들의 눈물을 표현했다고 했다.
집에서 지하철 왕복 3,000원이면 세계적 수준의 전시를 감상할 수 있다니. 입장료는 무료지만 퀄리티는 전혀 무료수준이 아니었다. 전시 구성, 작품 해설, 시설 모든 면에서 세계 어느 유명 미술관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수준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같은 시설들이 무료나 그에 준하는 가격으로 운영되는 것은 국가가 손해를 감수하며 국민의 문화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국민으로써 이런 혜택을 누리지 않으면 손해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육아휴직 전의 나는 문화생활이라고 해봐야 주말에 집에서 즐기는 넷플릭스가 전부였다. 이제 평일에 시간적 여유가 생기고 나서는 이제는 전시 일정을 챙기고, 작가들의 배경을 찾아보고, 작품 속에서 삶의 통찰을 얻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육아휴직은 단순히 아이를 돌보는 시간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그동안 직장생활에 쫓겨 놓쳤던 자신만의 취향을 발견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기회가 된다면 한 달에 한 번, 마지막주 수요일 미술관. 새로운 경험으로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