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만 여섯 가지인 기록러
노트나 다이어리를 살 때만큼은 내 사전에 "아무 거나 사"라는 말은 없다.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나는 장인이 아니기에 도구를 가리는 쪽이다. 무엇을 하든 내 마음에 드는 제대로 된 도구가 갖추어져야 시작할 의지가 생기곤 한다. 앞의 글에서도 말했듯, 그게 문구 관련이라면 더욱 그렇다. 노트와 펜 하나도 허투루 사지 않는 사람의 기록 용품을, 여섯 개의 노트를 시작으로 천천히 소개해보고자 한다.
각각의 노트를 구매한 순서대로 숫자를 붙여 보았다. 그러는 쪽이 소개하기에도 더 수월할 것 같았다. 내가 기록용으로 쓰는 노트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라인, 모눈, 도트 등 어떤 양식일지라도 너무 진하면 안 된다. 글씨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틀을 잡아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한다.
2. 부드러워야 한다. 종이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유난히 '사각사각' 써지는 종이가 있고, 어떤 펜을 쓰든 부드럽게 써지는 종이가 있다. 후자를 선호한다.
3. 180도로 펼쳐져야 한다. 물론 요즘은 대부분의 노트가 기본으로 180도로 쫙 펼쳐진다.
1번. 로이텀 제품으로, 앞의 글에서 언급되었던 필사노트다. 단단한 가죽으로 둘러 싸여 있고 '하드 커버' 제품인 만큼 글씨를 쓸 때 앞뒤에 무언가를 받치지 않아도 된다. 내부 형식은 도트(Dotted) 형식이다. 종이의 경우 - 주관적일 수 있지만 - 내가 가진 노트들 중 가장 부드러운 편이다. 평소 애용하는 쥬스업 0.4와 가장 잘 어울리는 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나미 라이브칼라 같은 두꺼운 펜을 써도 뒤에 비치지 않는다.
2번. 몰스킨 제품으로, 첫 번째 글에서 언급되었던 노트다. 이것 역시 도트 형식이다. 여섯 개의 노트 중 유일하게 외출 시에도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포켓 사이즈답게 한 손에 쏙 들어온다. 1번과는 달리 '소프트 커버' 제품이어서 자칫 흐물거린다고 느껴질 수 있으나, 그만큼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이 노트에는 매일의 계획과 스케줄을 비롯하여 문득 드는 생각 내지는 아이디어, 사야 할 것들, 크고 작은 일들 등 정말 모든 걸 적는다. 그러다 보니 3번이 필요해졌다.
3번. 아날로그키퍼 제품으로, A6 사이즈의 아담한 노트다. 이 노트는 작은 모눈 형식으로, 정말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 처음에 이 제품을 사게 된 건 2번에 쓴 이모저모를 정리할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많아질 때 혹은 지금의 생각을 어딘가에 붙잡아두고 싶을 때 부담 없이 펼쳐 적어 내려간다. 일기라고 하기엔 9할 이상이 온전한 나의 생각으로 채워져 있는, 일명 '생각 노트'다.
4번. 오브레코드 제품으로 라인 노트이며, 여섯 개의 노트 중 가장 '일기장'으로서의 성격을 띤다. 하루하루의 일기를 쓰기보다는 이런저런 일이 많았어서 일기를 쓰고 싶은 날만 골라 쓰거나, 혹은 며칠 간의 일들을 한 번에 쓰기도 한다. 일기는 매일 써야 할 것만 같은 왠지 모를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것 역시 쥬스업 0.4와 아주 잘 어울린다.
5번. 3번과 같이 아날로그키퍼 제품이다. 아무런 양식도 없는 무지 노트여서 비교적 자유롭게 기록할 수 있다. 이 노트는 '영감 노트'다. 책에서 기억하고 싶은 좋은 구절을 만나면 필사 노트에 옮겨 적곤 하는데, 책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마음에 드는 표현이나 좋은 문장을 발견하면 어디에 기록해야 할지 고민하다 만든 공간이다. 읽는 행위를 좋아하기 때문에 책뿐만 아니라 뉴스레터나 문학 매거진, 심지어는 SNS에서 보게 되는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고스란히 옮겨 둔다.
6번. 여섯 개 중 가장 최근에 가지게 된 컴포지션스튜디오 제품이다. A6 크기로 3번과 동일한 사이즈다. 이 노트의 용도는 독서 노트다. 이전에는 책을 눈으로 읽기만 했으며 기록이라고 해봤자 연필로 밑줄을 긋는 정도였다. 이렇게 책을 읽게 되면 독서 직후에는 머릿속에 남는 게 있지만 하루만 지나도 증발해 버리기 일쑤여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5번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형식이 없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들이나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마구 적어둔다. 등장인물이 많거나 이름이 헷갈리는 문학 작품의 경우 인물관계도를 그리기도 하고, 키워드를 적어두기도 한다.
기록을 할 때 필요한 다른 부수적인 용품들도 많지만, 그럼에도 기본은 '노트'다. 나는 유독 하나의 노트에 여러 가지를 기록하는 걸 못하는 편이어서 언젠가 또 새로운 용도의 노트가 더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이미 예정된 게 있다면, 바로 어제 주문한 아날로그키퍼의 다이어리가 내년 기록생활에 더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