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호의 심장소리. 등대 둘. 눈속 동백꽃. 그리고 눈송이
먼바다에서부터 휘몰아치는 그날 바람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혹여나 칼바람이 내 목에 들이칠까 겁나
나는 점퍼지퍼를 목까지 바싹 끌어올리고
칭칭칭 목도리를 돌려감아 단단하게 둘렀다.
처음 올라가 보는 그 산책길은
시내에 있어서인지
운동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난 호젓한 길이 좋은데.
외진 숲길만 찾아다니는 내가
좋아할 만한 길은 아니겠네.
산책길에 접어들기도 전에 실망스러웠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무기력하게 늘어져있던 내가
제 발로 걸어나와
산책길 위에 서 있다는게 좋았다.
그럼 됐지 뭐.
자아.
가보자고!
나를 스치고 내려가는 사람들과
나를 스치고 올라가는 사람들.
팔을 90도로 접고 힘차게 내젓는 사람들과
뒷짐을 지고 땅을 바라보며 걷는 사람들.
나는 느린 달팽이처럼 그들사이에 섞여 들었다.
우거진 소나무 군락을 지나
산책로는 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우웅.웅.우우웅.웅
저 먼바다에서부터 달려온 눈바람이
벼랑에 닿아 크게 부딪히면서
허공에서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
이 길 끝에 바다가 있는 모양이지?
굽어진 길로 접어 드니
과연 바다가 펼쳐졌다.
오.
바다와 절벽을 끼고도는 산책길이 멋졌다.
이 길 꽤 괜찮은데?
절벽밑에서 거슬러 올라와
나를 거칠게 훑고 지나간 눈발은
내 오른편에 서 있던
해송들 머리끝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갔다.
너희들 정 그렇게 힘들면
이제 그만 제주 생활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라.
서울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 어떠냐?
아버님은 제주에서 자리 잡느라
허덕거리던 우리를 말없이 지켜보시다가
마침내 최후통첩처럼 그렇게 말씀하셨다.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게 어떻겠냐.
아버님 말씀은 우리에게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다 때려치우고 당장 서울로 올라와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낯선 타지에서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대는 우리가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인 줄 안다.
오랫동안 공들이고 애써왔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는 집중하고 노력한 시간의 무게만큼
깊은 절망과 심각한 무기력함에 빠져있었다.
남편과 나 둘 다 그런 상태였다.
맘처럼 되지않는 인생살이.
삶은 럭비공처럼 이리 저리 튕겨나갔다.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노력과 집중은 결과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았다.
노력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고
집중이 흐트러진 삶도 아니었다.
뭐.
언제는 원하는대로 다 살아지던가만은.
만신창이가 된 패잔병의 모습으로
정말 이곳을 떠나야 하는 걸까.
처음으로 그런 고민을 했다.
아버지 말씀처럼
우리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게 어떨까.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둘 다 쉬이 잠들지 못한 밤에
어둠 속에서 등을 대고 누운 남편이 말했다.
남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자리에서 돌아누우며 말했다.
아니.
난 그럴 수 없어.
이곳에서 자릴 잡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서울로 올라가.
그동안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그건 안돼.
시커먼 구름이 수면 위로 차곡차곡 내려앉은 바다.
왼편으로 내리 꽂힌 절벽은 까마득했다.
바람이 휘저어놓은 바다는
커다란 파도를 몰고 왔고
그렇게 떠밀려 들어온 파도는
절벽에 우르릉 탕 부서지며 큰 포말이 일었다.
절벽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진 파도는
큰 소리를 내며 울다가
다시 뒤로 쭈우욱 뒷걸음치며 밀려났다.
파도는 바람을 타고
다시 절벽을 향해 달려와
아까보다 더 크게 있는 힘껏 절벽에 부딪혔다.
우르르릉 쾅. 그르르릉 터덩.
우우웅웅웅.우웅.웅.우웅
절벽 낭떠러지 위로 툭 튀어나온 바위.
산책로에서 그곳으로 빠지는 샛길은
아주 협소했고 위험했지만
사람들 발길에 닿고 달아 번들거렸다.
언젠가 내 친구가
이 오름 산책로 절벽 위에
자살 바위가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자살 바위.
사람들은 산책길 벼랑 끝에 있는 바위를 그렇게 부른다 했다.
아. 그 바위가 이 바위구나.
삶의 벼랑 끝에서 서서
저 먼바다를 바라봤을 그들.
나는 벼랑 끝 그 자리에 서서
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그들의 절망과 내 삶의 고통을 생각했다.
삶과 죽음의 길이 공존하는 이 자리.
왼편으로 한 발을 내딛으면 죽음의 길이요.
오른편으로 서너 걸음 내디디면
아름다운 산책로가 이어지는
삶의 길이 있었다.
기어이
왼편으로 한 발짝 내디뎌버린 이들은 몇이나 되며
오른편으로 서너 발자국
다시 삶의 길로 되돌아 나온 이들은 또 몇이나 있었을까.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소리는
맹수처럼 성을 내며 더욱 더 거칠어졌다.
절벽을 내려다보던 내 머리카락이
후루르룩 허공으로 휘날렸고
내 몸은 거센바람에 한 발짝 뒤로 떠밀렸다.
브르르르릉 부우웅 브르릉 부우우웅
절벽 왼편 항에서
여객선 페리호의 시동소리가 아주 크게 들려왔다.
먼바다로 나갈 채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카페리호 심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강하고 힘차던지
삶의 심장이 펄떡 펄떡 격동하는 소리같았다.
절벽을 울리던 웅웅 거림은
이제
페리호의 힘찬 엔진소리에 묻혀 사그라졌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방파제 끝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등대 둘.
바다 저 멀리부터
눈보라가 다가오고 있지만
등대들은 요동치 않았다.
산책길 옆 동백나무들은
허연 눈을 뒤집어쓰고 서 있었다.
눈 쌓인 나무들 틈새
빨간 동백 꽃봉오리라니!
나는 눈속에서 만난
동백꽃이 반가워서
동백꽃 쪽으로 몸을 숙이고
동백꽃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동백꽃을 처음 본 사람처럼.
꽃이 매달린 동백나무에는
아직 피지 않은
도톰한 꽃망울들이 구슬처럼 올망졸망했다.
그때,
절벽을 타고 날아온 눈송이 하나가
코 끝에 내려앉았다.
제법 큰 눈송이였다.
앗. 차거
콧등에 닿은 눈송이가 찰라에 사라졌다.
다 지나갈테니 걱정마.
눈송이가 그렇게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나는 씩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