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들이 다녔던 시골 작은 학교에서
대략 10년 동안
금요일 학부모 책 읽어주기 활동을 했었다.
매년 해가 바뀌면
모임 멤버들은 미리 모여서
그 해에 본인들이
책 읽어주기 들어갈 학년을 정했다.
아이들 학교는 아주 작은 시골학교라서
한 학년에 한 반뿐이었다.
나는 늘 5학년이나 6학년 반에 들어가 책을 읽어주었다.
책읽어주기 모임에 들어온 신입 멤버들은
이제 막 사춘기를 달리고 있는
5,6학년 아이들 반에서
책 읽어주기가 힘들다고했다.
사춘기를 직통으로 지나가고 있는 고학년들은
책을 읽어줄 때 삐딱하게 앉아서
헛소리를 픽픽 해대거나
리엑션을 잘 안해줘서 책읽어주기 어렵다는거다.
하여튼
이러 저러한 이유로
나는 거의 10년간 고정적으로
5.6학년 담당 책읽어주기를 했다.
(나도 삐약 삐약 저학년반 좋아했다.)
과학선생님이 학교에 부임해 오신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6학년 담임을 맡으셨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의 별명은 카리스마 최다.
카.리.스.마. 최!
그가 누군가?
학교에서 그가 가진 포스는 어어어엄청난 것이었다.
그런 그 앞에서 아이들의 필살기는
도망가기, 숨기. 투명인간되기. 36계 내빼기였다.
장난을 치다가 그에게 걸리는 날에는
가련한 아이들은
두 눈썹 양끝을 내려뜨리고
세상이 다 망한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난 끝났네. 망했네. 난 이제 죽는다)
진땀나는 그의 훈계를 들어야 했다.
카리스마 최 샘은 키가 180넘은 장신이었고
호리 호리한 체형이었다.
목소리는 아주 묵직한 저음이었다.
(그 묵직한 저음은 공포감에 휘발류를 뿌렸다.)
그의 입 매무새는 늘 단호하게 닫혀있었고
매처럼 쏘아보는 그의 매서운 눈빛은
장난꾸러기 녀석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가로열고,오늘도 딱 한 놈만 걸려봐라.가로닫고)
일 년 사시사철 무표정함으로 단속된 그의 얼굴은
그 앞에서 아무리 웃긴 일이 벌어져도
그가 크게 소리 내어 웃거나
입을 활짝 벌리고 하하핫 웃는 법이 없었다.
아주우 가끔,
그가 웃을 땐
한쪽 입꼬리만 살짝 추켜올려 픽. 웃은 다음
냉큼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는
다시 십초이내로 냉혈한 같은 얼굴로 돌아갔다.
그것이 학교에서의 그의 캐릭터였다.
카리스마 샘은 아이들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학부모들에게도 그랬다.
워낙 바른 소리를 잘하셔서
학부모가 자칫 말도 안되는 말과 행동을 했다가는
그도 역시 그 앞에서
세상 다 망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송곳같은 훈계를 들어야 했다.
그는 학부모사이에서도
대하기 어렵고
까다롭고 어려운 선생님으로 아주 유명했다.
그러나 나는 카리스마 샘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가 태생적으로
얼음장처럼 차갑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 학교로 부임하자마자
모름지기 학교에는 적어도
무섭고 어려운 선생님이 한분쯤은 계셔야
아이들 교육에 좋다는
교장선생님의 특별한 부탁이 있었다 했다.
그러니까설라므네,
교장선생님의 작전하에 최샘의 캐릭터가 그리된 것이다.
그 얘길 누가 들려줬더라.
아.학부모 회장이 내게 말해줬던 것 같다.
교장선생님도 너무했지.
최샘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사주팔자에도 없는
독사(어느 학교에도 한분쯤 계시는)가 되어야 했단 말인가.
그는 매일 출근길에 차를 몰고 오며
수십번 맘을 다잡고
자기 최면을 걸었을 것이다.
나는 오늘 독사가 됩니다.
나는 오늘 독사가 됩니다.
됩니다, 독사가.
독삽니다. 독사.
난 독삽니다.
몇 년 후에
시간이 지나
최샘이 우리 큰 애 담임선생님이 되었다.
생각했던대로
최샘은 여느 샘들보다도 부끄럼이 많고
마음이 여린 정말 정말 다정한 샘이셨다.
책 읽어주기 모임 친구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그런 카리스마 샘이 담임인
6학년만 싹 빼놓고
후딱후딱 속전속결로 한 학년씩 골랐다.
3학년은 내가 들어갈게.
2학년은 나.
난 유치원.
4학년은 나야. 식으로.
아니이.
그러니까아.
6학년은 누가 들어갈 거야?
내가 그렇게 묻자
모임 친구들 시선은 내게로 모아졌다.
자고로 6학년은 모임장이 맡아야지.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하자
나머지 친구들이 벌떼가 웅웅거리듯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모아말했다.
당연하지.
6학년은 원래 모임장이 맡는 거 아니?
(비겁한 자들.)
그런 말도 안 되는 규칙은 없었다.
본인들은 죽어도 카리마 샘반에 들어가기 싫으니
나를 제물로 삼았다.
(친구야.너만 죽으면 돼. 물 한잔 해!)
자아아아.
6학년은 또리 엄마가 들어가고!
빠진 학년 없지?
밥이나 먹으러 가자.
친구들은 나에게 최샘 반을 떠맡기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나는 그 해 일년동안
카리스마 샘 반에 들어가 책을 읽어주었다.
매주 금요일 아침 8시 45분에.
딱 15분 동안.
금요일 아침이 되었다.
나는 내 새끼 둘을 챙겨 차에 태우고
6학년 아이들에게 읽어줄 책 한 권을 챙겨서
학교로 달려갔다.
아이들은 각자 교실로 들어갔고
나는 책을 읽어주러 육 학년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에 들어가 보니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막 가방을 내려놓고 있었다.
안녀엉.
기요미들아.
기분 좋게 인사를 하며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로 들어선 나를 발견한 아이들이 말했다.
엇. 이모.
이모가 올해도 우리 반 책 읽어주시는 거예요?
오냐. 왜. 뭐!
이모가 책 읽어주는 게 이제는 지겹냐?
아아니이요오오?!
6학년 아이들이 5학년이었을 때
나는 녀석들에게 1년 동안 책을 읽어줬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난 후
또다시 내가 너네한테 책을 읽어주마. 나타나니
아이들이 나에게 그렇게 인사를 건넨거다.
교실로 들어가니 카리스마 샘이 계셨다.
(뚜우우우둔.뚜우우둔.
뚜둔 뚜둔 뚜둔 뚜둔 뚜둔.)
나는 카리스마 샘을 발견하자마자
책다발을 각잡아 정돈한 후 옆구리에 끼고서
처언처언히 구십 도로 허리를 굽혀서
최고로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오늘도 독오른 독사처럼
당신 책상앞에 앉아있는 그를 보니
그의 카리스마에 기가 눌렸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서
인사를 하면서 헛 말이 나올 뻔했다.
쌔앰. 안녕하십시요오.
(농담이지만 진짜 그럴뻔했다.)
하나둘씩 등교한 아이들이 자리에 앉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애들아.
내가 마랴.
일년동안 너네한테 읽어줄 책을
엄청 고민하다가 드뎌 결정했다.
어떤 책인데요?
젤로 재밌는 이야기들만 들려줄 거다.
우와아앙. 좋아요.
그날 아이들에게 읽어주러 가져간 책은
아이들의 히어로이자
나와 우리 집 아이들이 최고로 애정하는 작가
로얄드 달 작가님의 창문 닦기 삼총사였다.
내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로얄드 달 작가 아냐? 하고 물으니
여럿 아이들이 안다고 대답했다.
우옷!
그거 찰리와 초콜릿공장 쓴 작가잖아요?
마틸다.
내 친구 꼬마 거인 쓴 작가잖아요.
아이들 입에서 로얄드 달 작품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흘러나왔다.
아이들이 로얄드 달 작가 작품들을 읊어댈 때
나는 기분이 좋아서 속으로 생각했다.
햐!
역시 로얄드 달 작가 책을 고르길 잘했어.
녀석들이 좋아서
아주 그냥 환장을 하는구만.
로얄드 달 작가를 아는 아이들이
잘난 체를 하며 작품들을 좔좔 읊어댈 때
교실 구석에 조용히 앉아있던 한 친구가
삐딱하게 말했다.
전 그게 누군지 모르는디요?
어?
아.
그르취.
그 작가가 쓴 책을 봤어도
작가 이름을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모를 수도 있지!
괜찮아.
애들아.
책을 볼 때는 표지에 적힌
작가이름도 꼭 봐봐.
겉표지 넘기면 그 뒷면에 작가소개란이 있잖아?
그것도 읽어봐.
그러다 보면 그 작가가 이 책도 썼네.
어? 이 작가가 그 책도 썼다고? 하고 알게 된다?
철두철미하게 독사가 될 준비가 되있는
샘은 책읽어주는 내 뒤통수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를 등지고 서서
6학년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그날 책 내용은
로얄드 달 작가의 장난끼어린 본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너무 심하게. 내가 이 글을 발행할까 말까 고민하게까지 만든)
문장들이 들어차 있어
능청맞고 뻔뻔스럽게 웃긴 이야기였다.
그날은 그 해 첫 책읽어주기 시간이었다.
한살 더 먹고
사춘기 호르몬 농도는 더 짙어진,
내 까다롭고 차가운 청중들을 휘어잡을
킥.이 필요했다.
로얄드 달의 핵폭탄 같은 문장들이 그 킥이 될 것이었다.
냐하하하.
(니네 딱 거기서 기다려라.)
삐딱하게 앉아 책읽어주는 나를 향해
(도대체 언제 끝나냐.하는 표정으로)
꼬나보고 있을 사춘기 녀석들의
책에 대한 시선과 관심과 호기심을
한방에 끌어내기엔 로얄드 달 작가가 딱이었다.
파격적이고 충격적이기까지한
그의 살아있는 문장들이여.
6학년 사춘기 내 청중들을 책의 세계로 인도하라.
책에 홀려 제 발로 도서관을 찾아가는 기적을 만드리니.
이야기 분위기를 살려 책을 읽어주느라
나는 졸지에 푼수 이모가 됐다.
(뭐. 언제는 안 그랬겠는가.
아이들 앞에서 이건 특별한 일도 아니다.)
아이들에게 내 이미지가 구겨지는 것까진 좋다.
문제는 내 뒤통수에 앉아 있는 샘이었다.
젠장!
내가 푼수 짓을 하며 책을 읽고 있는 걸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생생하게
귀바퀴속으로 들려오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계실 카리스마 그가
어찌 신경쓰이지 않을수 있냐.이말이다.
샘은 내 뒤통수를 지키고 앉아서
내가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것을
실시간 스테레오로 들으며
속으로는
(반드시!)
(분명히!)
배시시 시 웃고 계시리라.
뭐. 그날 책 내용이 그랬으니까.
띠이이 띠이이 띠이
잠시 경고 말씀있겠습니다.
아래 글에는 충격적인 문장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프로 불편러이시거나 교육적인 잣대가 칼같은 독자분들은
이쯤에서 돌아가기를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이후 발생하는 작가에 대한 불편한 심기에 대해서
작가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극 소심좌 작가의 말.걱정.우려.번민을 대신합니다)
오오오오오케이
내가 읽어준 문장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햄프셔공작이 자기 집에 든 도둑을 향해
도둑 잡으라며
동네방네 크게 외치던 그 한마디!
상상이 가는가?
내가 이 대목을 어찌 읽었을지.
나는 마치
진짜 화가 난 햄프셔 공작처럼
내 오른 손날을 칼처럼 세워서
내 명치끝에서 시작하여
배꼽부근까지 내려가며
배 위에다가 쓱싹쓱싹 칼질을 했다.
구절에서는
갈라진 내 배를
오른손과 왼손으로 잡고서 양쪽으로 좍 댕겼다.
뱃속에서 내장을 한 움큼 꺼내서
책을 든 왼손으로 내장 한 쪽 끝을 잡고
오른손으로 곱창 손질하듯이
(가로 열고,진짜 곱창은 손질해본적도 없지만.가로닫고)
죽죽 좍좍 훑는 동작까지 해가며
이 구절을 읽었다.
아이들이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내가 하는 짓이 웃겼는지
교실 여기저기서
크핫.크크크큭. 웃음이 터졌다.
아이들이 키키킥대며 웃음이 터지는 동안
나는 일말의 미소따윈 흘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도둑맞아서 아주 화가 난 햄프셔 공작이기 땜에.
햄프셔 공작으로 빙의되어 화를 내고 있는 나는
도둑놈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좍좍 훑으면서도
내 뒤통수에 앉아 있는
카리스마 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
나도 경건한 학부모니까 말이다.
( 가로열고.내 이미지 으짜까.가로닫고)
상쾌한 금요일 아침,
경건한 학부모가 신성한 교실에 들어와서
빌어먹을!
내 그놈 내장을 죄다 훑을 테다! 는
쫌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난 했다.
학부모 위신보다
6학년반 아이들 재미가 먼저니까.
케헤!
학부모 위신보다 아이들 재미가 먼저라니.
책 읽어주기 모임장다운 생각 아닌가.
그날 책 읽는 내내
반 아이들은 웃음이 터질 타이밍에
맞춰서 와글와글 교실 안에 웃음이 터졌다.
그럴 때마다 아주 진한 희열을 느꼈다.
난 그 맛에 책 읽어주기를 하는 거니까.
15분 동안 휘몰아치며 책 읽기가 끝났다.
교실 시계를 올려다봤다.
여덟시 오십구분이었다.
캬.
이 절묘한 끝냄.이라니!
책 읽어주기가 끝난 나는
다시 경건한 학부모 모드로 다급하게 전환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라는 표정을 지으며
내장을 훑느라 흐트러진 앞머리를
오른쪽 귀에다 꽂으며
시치미를 뚝 떼고 샘을 향해 돌아섰다.
샘은 내가 책읽어주는 동안
죽어라 웃음을 참았던게 분명했다.
샘 얼굴이 버어얼갰다.
버얼건 정도가 아니라 빠아알갰다.
샘 양쪽 귀까지 앵두색깔처럼 벌갰다.
세상에.
주여.
내가 아침부터 이 부끄럼쟁이 샘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란 말입니까.
이야기를 마치고 교실을 둘러보니
아이들 얼굴이 화악 피었다.
이렇게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준 날은
아이들 표정이 확 핀다.
이야기 잘 들어줘서 고마워.
오늘도 재밌게 보내.
다음 주에 만나.
나는 아이들에게 간단히 마무리 인사를 했다.
얼굴이 버얼게진 샘을 바라보며
푼수처럼 책을 읽어주던 모습에서
정상적인 학부모 모습으로 돌아와
아주우 공손하고 조신하게
다시 90도로 슬로우 모션처럼
처언처언히 허리를 숙여서 인사했다.
쌔애애애애애앰.
수고하십시용.
카리스마 샘은 벌게진 두 귀와
홍당무처럼 바알간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다.
아. 네. 어머니.
교실을 나오며 시간을 보니
아홉시 땡.이었다.
그날 첫 책 읽어주기가 끝나고
모임 멤버들이 도서관에 모여 앉아
책 읽어주기 활동 느낌나누기를 할 때였다.
그날 모임 친구들의 최대 관심사는
카리스마 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책을 읽어주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날 내가 했던 짓을 말했더니
나를 카리스마 샘 반 담당으로 들어가라며
내 등을 떠밀었던 친구가 말했다.
아니. 미친!
내가 뭐랬어.
최샘 앞에서 눈하나 깜짝 안 하고
그런 짓을 할 인간은 쟤 밖에 없다니까아.
(아니.그니까 마랴.
이건 일단 칭찬으로 받고
내년에 저학년 반에서 내 이미지는 수습하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