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낮은 발밑의 평화.

by 시안

가끔 맨발로 땅을 밟고 싶은 충동이 일 때가 있다.


내 안에서 아주 시끄럽고 어수선한 일들이

나를 들쑤시고 있는 경우 보통 그러하지만

늘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자연 안에서 가장 평화로운 순간을 느끼고 싶을 때도 혼자서 맨발로 자연을 걷는다.


맨발로 걷을 땐

맑고 쨍한 날도 좋지만

땅과 풀들이 촉촉하게 젖어있는

비 오는 날이라던지

아주 짙은 안개비가 오는 날이 오히려 더 좋다.

그런 날 오감에 닿는 풍경은

훨씬 더 풍성하고 밀도와 깊이가 있다.


주변이 사라진 것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진한 안개비가 내릴 때나

주룩주룩 차분하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비옷을 입고

바짓단을 접어 올려 종아리를 드러낸 후

운동화를 벗고

양말을 벗은 다음

맨발로 땅을 밟는다.


내가 맨발로 걷기 가장 좋아했던

마장 초원 테두리길은

우리 말들이 매일 지나다니는 길이어서

땅바닥은 말 발굽에 부드럽게 다져져 있었다.


질긴 잔디 같은 잡초들이 말 발굽에 수없이 밟혀

부드럽게 깔린 양탄자마냥 푹신거렸고

발굽에 거친 흙이 갈려 고운 흙만 남은 터라

맨발로 딛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맨발로 그 길을 걷다 보면

안개로 뿌옇게 경계가 흐트러진 초원옆 나무 어딘가에서 까마귀가 나를 경계하며 큰소리로 울었다.


까마귀는 나를 경계하며 울지만

나는 그 까마귀에게 인사를 건넸다.

거기. 나무에 앉아 있는 까마귀야. 안녕?

내 인사를 들은 까마귀가 머쓱해졌는지

시끄럽던 울음소리가 조용해졌다.


안개비를 머금은 연한 풀잎들이 부드럽게

내 종아리를 스쳤다.

발끝에 풀들의 촉감과

젖은 땅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들뜬 해방감에 한껏 가슴을 열어 숨을 들이키니

짙은 풀냄새와 습기 가득한 공기가

폐 속 깊숙하게 스며들었다.


비 오는 날

맨발로 땅을 밟으면

비에 젖은 고은 흙이

내 발에 질척하게 개어져

질벅 질벅 소리를 내며

내 발가락 사이로 삐져나온다.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로 삐져나오는

갯벌처럼 빗물에 잘 개어진 흙의 느낌을

난 아주 좋아한다.

유년시절 비 오는 날 맨발로 진흙땅을 이기며

빗물을 튀기고 놀던 추억이 떠오른다.


비옷 위로 투둑 투드득 빗방울들이 부딪힌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소리라고는

비옷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나의 고른 숨소리,

젖은 땅을 밟고 지나가는 나의 발소리뿐인것 같다.


비에 젖은 초원에선

싱그럽고 달큼한 풀냄새가 충만하다.

풀잎 끝에 방울방울 빗물을 단 풀잎들은

생기가 넘친다.

발바닥에 닿는 젖은 땅은 부드럽고 간지럽다.


초원 한가운데에 들어섰을 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서

무성한 풀들위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는다.

흐드득 흐두두둑 두둑 드드둑

위로가 되는 소리.

치유가 되는 소리.


내 안의 시끄러운 것들이

와글와글 요란을 떨수록

나는 내 맨발이 땅에 닿는

그 원초적인 촉감과

땅이 나에게 건네는 건강한 기운에 집중한다.


요동치며 불안정하게 들썩이는 내 안의 에너지는

발끝 예민한 감각들에 집중되어 모여있다가

땅을 밟으며 걸을 때

대지의 수용적인 너그러움에

맨발이 딛고 가는 자리로 조용히 빠져나간다.


땅이 가진 생명력과

땅이 지닌 고유의 평안함은

시끄럽고 어수선한 에너지가 빠져나간 자리를 따라

맨발바닥에 닿고 내 오감으로 퍼져올라와

상처 나고 지쳐있는 나의 영혼과 육체에

건강한 에너지를 충전시킨다.


두 손은 뒷짐을 지고

시선을 바닥을 향하여

내가 내딛는 땅을 바라보며

아주 천천히 한발 한발

맨발로 초원길을 걸을 때마다

그런 나의 모습이

진지한 의식을 치르는 수행자 같다고 느낀다.


가장 낮은 발밑의 평화가

가장 높은 머리끝의 소음을 잠재우는 놀라운 과정.

수행자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나와 대지가 가장 밀접하고 원초적으로 만나는 순간.

생명력과 평화로움과 안정감이 가장 충만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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