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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n번째 직장

탈기자 성공기

이 선택이 잘한 건지는 모르겠다

by 데자와

요새 기자들의 '탈기자' 소식이 자주 들린다.

직접적으로 듣는 건 아니지만 아직 현직에서 일하는 기자 친구에게 듣기도 하고, 페이스북으로 데면데면하게 친구만 맺어져 있는 사람들의 소식도 눈에 띈다.


대게는 기업으로의 이탈이다. 특히 스타트업 및 IP업계에서 기자 출신들을 많이 영입하는데 영입금액도 상당한 것 같다.


기자로서 '경력직 기자'로 가기에는 무리라는 판단을 하고, 내가 선택한 것은 '홍보' 직군이었다.


홍보 직군은 기자들이 '탈기자' 하기에 가장 쉬운 루트다.

글쓰는 실력과 언론사 인맥을 두루 갖췄기에 홍보팀 채용시 "기자 출신"을 내거는 경우도 많다.


채용 이후에 그 회사가 나의 경력을 그대로 존중해주는 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다.



'경력직 기자' 채용에서 '홍보'로 눈을 돌리고 나니 이력서를 쓸 곳이 눈에 더 자주 들어왔다.


그중 한 곳은 여행사였다. 여행사에 특별히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행을 워낙 좋아하기도 했고, 사기업에 넣는 첫 이력서로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당시 '언론사 탈출'이 목까지 차올랐던 터라 같이 일하던 선배한테 이력서를 봐 달라고 하기까지 하며 서류를 제출했다. 그리고 회사에서 면접을 보라는 연락이 왔다.


기자여도 사무실에 꼬박꼬박 출근해서 얼굴을 비쳐야 하는 회사의 특성상 나는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출근도장을 찍자마자 "병원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고 면접장으로 향했다. (몸이 안 좋아 보이기 위해 입술에 파운데이션 가루를 푹푹 묻혀가며 허옇게 만든 건 안 비밀)


회사는 용산역 근처에 있었다. 생각보다 작은 사무실 규모에 놀라며 면접을 봤는데 당시 면접관의 태도가 꽤나 놀라웠다. 이 회사는 직원을 위한 다양한 복지 혜택을 중점적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면접에 대한 답변을 하다 보니 이 내용을 입에 올리게 되었는데 당시 채용 담당자는 꽤나 냉소적인 태도로 "그거 다 홍보용이에요"라고 말했다.


사무실 느낌도 그렇고 면접 중에서 그닥 내가 가고 싶은 회사란 느낌은 안 들어서 최종 합격 연락을 받았을 때 고사했다.


그 쪽에서 제안한 연봉이 현재 기자 연봉에서 조금도 늘어나지 않기에 갈 이유가 없었다. 내가 일하는 분야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인데 새로운 업무 및 환경에 대한 리스크를 떠안으면서까지 별반 차이 없는 연봉을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고사 이유 중의 하나로 연봉을 얘기하자 담당자는 "그럼 제가 그 부분은 조금 더 무리해서 양보해볼게요"라고 하더니, 내부 검토 후 준다던 답변은 겨우 몇 백 차이의 연봉 차이 수준이었다. 갈 이유가 완전히 없어졌다.




다음으로 면접을 본 곳은 대기업 계열의 공익재단이었다.


사기업 홍보팀은 아니지만 대기업 산하에 있는 공익재단이니 커리어로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출근 전에 휘뚜루마뚜루 이력서를 써서 제출했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우리나라에서 이름만 대면 알 창업가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재단이니 개인적인 흥미도 생겼다.


1차 면접을 무난히 치르고 최종면접 대상자로 호출됐다. 면접장에서 다른 면접자들과 함께 대기를 하고 있는데 굉장히 자신감 뿜뿜하는 지원자가 눈에 띄었다. '저 여자 뭐지...'하고 있는데 나보다 용기 있는 다른 지원자가 그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1차 면접 때 못 뵌 분 같은데 언제 면접 보셨어요?"라고 묻자 그 지원자는 "아, 저는 추천으로 온 거라서요" 이러면서 뭔가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라는 느낌을 은근 강하게 내비쳤다.


공식적인 1차 면접에 참여하지도 않고 추천으로 왔다는 건 결국 낙하산이라는 얘긴데, 저걸 저렇게 당당하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큰 기대감을 가지지 않고 면접을 치르고 나서 나는 곧바로 여름휴가 겸 제주도로 떠났다.



결과 발표에 미련을 두지 않던 어느 날 그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저희가 정말 최종적으로 한 번만 더 면접을 보려고 하는데요. 혹시 저녁 때 면접보러 오실 수 있나요?


업무가 끝난 저녁에 면접 보는 거야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굳이 발표를 미루고 한 번 더 부르는 이유가 궁금했다.


최종 면접장에서 보았던 그 '낙하산'하고 나를 두고 고민하는 건가.


그래도 성실히 임하자란 생각으로 입장한 '최최종 면접' 자리에서 나는 그만 면접 도중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공익재단이 운영하는 대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의 후기 때문이었다. 면접을 앞두고 재단 공식 블로그가 아닌 어떤 한 학생의 개인 블로그 글을 보게 되었다. 뭘 지원해도 잘 되지도 않고 자신감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포기하던 차에 이 재단의 대학생 프로그램에 뽑혀서 너무 기쁘고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학생의 진심이 글에 잘 느껴졌던 터라 인상깊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


면접관이 마지막에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나 궁금한 걸 물어보라고 해서 나는 이 사례를 언급하며 그 대학생 프로그램에 대한 화제를 입에 올렸다. 이 재단에 대한 내 관심을 표현하며 무리없이 면접을 마무리 지으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면접관이 뜻밖의 답변을 했다. "사실 그 프로그램이 생활이 좀 어려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다. 우리가 그걸 표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실제 운영을 할 때는 그렇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 면접을 보면서 운 것은 이때가 내 인생 처음이었다. 취업준비생 때도 면접장에서 눈물을 흘려본 적 없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면접관의 그 답변을 듣자마자 눈물이 나왔다.


스펙이 좋고 나름 집안환경이 괜찮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학생의 후기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나자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올랐나 보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 학생은 (집안)환경이 좋을 거야'라고 판단했는데 그건 내 편견이었다.


면접 중에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울어버린 나도 당황했지만 면접관도 놀랬다.


면접을 마치고 나오면서 '면접장에서 울었으니 이번 면접은 망했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합격 통지를 받았다. 기자에서 공익재단의 홍보 담당자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나는 탈기자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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