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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n번째 직장

계약직인데 왜 회사를 꾸역꾸역 계속 다녀야 하죠?

계약기간에 발목잡힌 인턴 친구들에게

by 데자와

나는 내 이직에도 진심이지만 남의 이직에도 관심이 많다.


특히 '채용 희망고문'을 볼모로 일하는 인턴 또는 계약직 친구들에게 내가 하는 말은 항상 같다.


여기가 뭐라고 계속 다녀. 계약기간 6개월 다 채워야 한다고? 그런 게 어딨어. 계약직이면 너도 네 맘대로 그만둘 수 있는 거야.


내가 다니던 회사는 인턴을 정말 정직원 대용으로 쓰던 회사였다.

3개월~6개월짜리 인턴을 뽑아서 한 해 사업을 맡겼는데, 월급은 인턴이지만 실무는 정직원과 함께 밤새가며 다 해야 했다.


대개 대학을 막 졸업하거나 휴학한 친구들이 인턴을 했는데 이들이 남들 눈을 피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격무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걸 볼 때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대부분 이 친구들의 이야기는 "너무 힘든데 계약기간은 다 채워야 하잖아요"였다.


나 또한 어딘가의 정규직이 되기 전에 세, 네 군데의 회사에서 2년 이상의 기간을 인턴 또는 계약직으로 일한 경험이 있다.


막상 정규직이 되어보니, 내가 정규직이 되기까지 필요한 인턴 경력은 짧으면 짧을 수록 좋은 거였다.

어차피 그 인턴 경력 정규직 입사 때 지원서에 다 적지도 않을 거거든.


내가 그 시간을 인턴 또는 계약직으로 일하지 않고 어딘가의 정규직으로 더 빨리 입사하는데 썼다면 현재의 정규직 연차는 그보다 훨씬 높을 거다.



나하고 맞지도 않는 일을 <계약 기간이 남았다>는 이유로 버티면서 일하는 건 아니라는 걸 나도 회사의 한 선배로부터 배웠다.


미국에서의 언론사 인턴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4학년 재학기간 중에 한 마케팅 대행사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경영학과를 다니면서 '마케팅과 광고가 짱 멋진 거다'라는 사상을 주입받은 나는 당연히 마케팅 회사에서 인턴 경험을 쌓는게 입사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한 학기 휴학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다녀본 회사는 내가 생각한 거와 달랐다.

회사 이름은 'OOOO 컨설팅'인데 정부 사업을 수주하는 걸 '위대한 성과'로 간주하는 회사였는데, 수주를 따내기 위한 PPT 제안서를 만들 때는 글자포인트를 6~8포인트로 깨알같이 써야 하는 이상한 법칙을 가진 곳이었다.


입사와 동시에 매일 PPT를 붙잡고 회사에서 눈이 빠지도록 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자정이 다 될 때까지 그 깨알같은 PPT 텍스트를 고치고 새벽 택시를 탈 때면 현타가 왔다.


이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인가?



인턴기간이 6개월로 못박혀 있었기에 나또한 '6개월을 다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때 나에게 "인턴 주제에 뭘 걱정해. 너가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는 거지"라며 'Bullshit'을 외친 선배가 있었다.


미국에서 일하며 알고 지낸 언론사 선배는 내 고민을 듣더니 '계약기간을 다 채워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라며, 네가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는 거라고. 정규직도 아닌데 왜 계약기간에 절절 매냐고 따끔하게 혼냈다.


물론 그 때의 나도 처음에는 "선배, 어떻게 중간에 그만둬요. 정해진 기간이 있는데"라며 반론했다. 하지만 선배는 그런 걱정 따위 넣어두라며 당장 대표한테 가서 언제까지만 나오겠다고 통보하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선배가 시키는 대로 했다.


대표실에 찾아가서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으니 이번달 말까지만 나오겠다"고 했다. 대표는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구체적인 마지막 출근일자를 머릿속에 생각해놓고 얘기를 꺼냈기에 내가 원하는 시점까지만 일을 하고 나올 수 있었다.


어차피 이 회사 취업 시켜줄 것도 아닌데 더 일해서 뭐하는가.


나는 그렇게 회사를 꾸역꾸역 다니는 대신 남은 휴학 기간을 미국여행으로 돌렸고, 미국 뿐만 아니라 캐나다까지 방문하면서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때가 아니었다면 평창올림픽 외에 해외의 올림픽을 경험해보는 일은 없었을 거다. 무엇보다 유럽여행에서 만난 캐나다 친구나 한국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알게된 캐나다 지인들을 조우할 수 있어 기뻤다.




그래서 나는 업무가 맞지 않아 힘들어하는 계약직이나 인턴들에게 과감히 그만두라고 말한다.


너와 맞지도 않는 일을 계속하는 건 아니라고, 이 시간에 다른 걸 하라고. 차라리 그만두고 너하고 좀 더 맞는 회사에 지원을 하거나 좀 쉬라고. 계약기간에 발목 잡힐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회사가 너를 계약직으로 채용했으니 그만두는 것도 네 자유라고.


그 친구들 역시 어렸을 때의 나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어떻게 중간에 그만둬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그 친구들이 우는 일이 잦아드는 경우는 없었다. 그럼 나는 다시 그들에게 "지금 네가 여기 계약기간 채운답시고 버티는 게 네 인생에서 더 시간 낭비"라고 얘기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조언을 했던 친구들은 계약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회사를 그만뒀다. 내가 그랬듯이.


물론 회사가 그 친구들을 순순히 놓아준 것은 아니다. 한 친구에게는 "너를 대체할 사람이 없으니 두 달을 더 일하라"고 하면서 그 친구가 원하는 시점에 그만두지 못하게 했다.


그럼 나는 선배가 나에게 그랬듯이 "너 자격증 공부할 거 많고 자격증 시험 코앞이라서 이번달까지만 나온다고 못박아"라고 조언했다.


결과적으로 그 친구들은 회사를 떠나고 나서 웃음을 되찾았다. 젊음을 저당잡혀 우울하게 회사를 다니는 청춘이 아닌 원래의 밝고 의욕 넘치는 20대로 돌아왔다.


한 친구는 회사를 그만두고 얼마 안 되어 본인이 원하던 직무에 좀 더 가까운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계약기간을 채운답시고 계속 일했다면 새 회사에서 일할 기회를 놓쳤을 거라며 내 덕분에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회사에 정식 채용이 되었고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결론은 단순하다.


어딘가의 신입이 되기 위해 경력이 필요한 세상이지만, 당신과 맞지 않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면 과감하게 나와야 한다. 거기서 일하는 동안 어딘가의 더 좋은 자리를 놓칠 수 있기 때문에.


정규직도 아닌데 울면서 출근하기에 20대의 청춘은 너무 아깝다.



화면 캡처 2023-08-11 120704.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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