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리스리 Dec 09. 2021

임신 막달에 아파트 엘레베이터 공사라니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순조로워야 할 임신 후기에 위기가 닥쳤다. 


아파트 엘레베이터 공사.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아파트 단지별로 올해 본격적인 엘레베이터 공사가 시행되고 있었는데,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올해 10월부터 공사 시작 예정이었다. 


12월 초 출산예정인 나에게 있어 10월 말부터 시작해서 11월 말에 끝나는 엘레베이터 공사 일정은 매우 부담스러웠다. 


"임신 막달 한 달 동안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다니" 


아파트 전체 엘레베이터 공사 일정은 10월부터 내년 3월까지인데 하필 내가 사는 아파트동의 공사 기간이 출산일 직전과 맞물리는 게 마땅찮았다. 


남편과 나는 관리사무소에 공사 일정 변경이 가능한지를 문의했다. 


관리사무소 직원은 "동대표한테 물어봐야 한다"며 추석이 지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관리소무소에서 온 답변은 이러했다.

"동대표들이 단톡방에서 묵묵부답"이며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동의 탑층 주민이 여러 차례 엘레베이터에 갇힌 사례 때문에 여러 동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공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특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동의 동대표가 침묵하는 것에 대해 관리사무소도 답변을 얻지 못해 답답해했다. 


본인이 사는 동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침묵하는 동대표도 동대표지만, 왜 엘레베이터 공사 순서가 이렇게 앞쪽에 배치되었는지 그간 막연했던 의문이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우리 동은 전체 아파트동 중에서도 '중간'에 속하는데 왜 전체 공사 일정 중에서 가장 앞쪽에 배치가 되었는가?'


보통 엘레베이터 공사를 할 때는 앞동부터 순차적으로 시작해서 끝동 순서로 끝난다. 결혼 전까지 부모님과 같이 살던 아파트가 이 순서대로 엘레베이터 공사를 진행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XX1동도 아닌데 가장 첫 달에 공사를 시작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는데 원인은 탑층 주민의 지속적인 문제제기였던 것이다. 


"원래 동 순서대로 엘레베이터 공사를 진행하지 않냐?"는 나의 질문에 관리소장은 "맞다. 엘레베이터 공사를 하는 시공사도 동 순서대로 순차적으로 하는 걸 선호한다"며 더 자세한 내막을 들려줬다. 


최근에 부품 교체가 이뤄진 우리동 엘레베이터는 순서상 뒤쪽으로 배치하는 게 맞으나 탑층 주민의 가족들이 수년 간에 걸쳐 여러차례 엘레베이터에 갇혔었고, 다른 동 엘레베이터에 비해 엘레베이터 자체의 문제가 많아 공사 순서를 전체 동 중에서도 가장 먼저 배치했다는 것이었다. 


관리소장은 "순서를 바꾸려면 탑층 주민의 의사를 물어봐야 한다"며 이미 공사 일정이 공고된 시점에서 변경은 어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와 남편은 다소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번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며칠이 흘러 관리사무소에서 온 연락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탑층 주민이 임산부가 계단 오르내리는 것은 아무 것도 문제가 안 된다는 둥, 자기도 애를 낳았지만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둥의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노약자들도 공사 기간 동안은 어디 딴 데 가 있는다"며 그 기간 동안 다른 데 가면 되지 않냐는 식으로 말을 했단다. 덧붙여서 공사 일정을 변경할 경우 본인이 다른 주민들로부터 공사 일정 변경 반대 서명을 받아서 저지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양수가 터지면요? 진통 겪으면서 계단 내려오다가 잘못 되거나 하면 그 집이 책임진대요?"


왠만한 일에 화를 잘 내지 않는 남편이 차분하지만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또한 어이가 없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탑층 주민이 본인 출산 때는 처해보지 않은 상황을 가지고 '임산부가 계단 오르는 건 아무 문제도 안 된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황당했다. 무엇보다 본인은 공사 기간 동안 옥상을 이용해서 옆 라인 엘레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 불편함을 겪지도 않으면서 남의 불편에는 쉽게 말하는 것에 화가 났다. 


임신 막달에 아기가 잘 내려오도록 하기 위해서 걷기 운동이나 계단 운동을 하는 것은 일부 맞다. 

그러나 계단 운동을 하더라도 계단을 '올라는' 갈 지언정 '내려올' 때는 엘레베이터를 이용해서 내려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계단을 내려올 때 가해지는 압력이 산모에게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사 기간 동안 시가나 처가 등 다른 집에 머무르는 것도 쉽지 않다. 이 동네에서 출산할 예정이고, 현재 산부인과도 동네 병원으로 다니고 있는데(무엇보다 임신 막달은 매주 병원에 가야 하는데) 같은 시도 아닌 다른 동네에 가 있으라니. 


애를 낳아본 사람이 하는 말치곤 앞뒤 생각 안 하고 마구 내뱉는 처사이자, 후안무치(厚顔無恥) 그 자체였다. 


동네주민들이 모이는 인터넷 카페에 이런 사연을 올리자 "공사 기간 동안 우리집에 오라고 하고 싶다" "진통 왔는데 계단 내려가는 건 무리다"라며 걱정해주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일면식도 없는 동네 주민들은 나를 걱정해주는 반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은 '나도 임신해봤지만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를 시전하는 상황이란. 


결국 공사일정은 변경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사 일정마저 10월 시작에서 11월로 한 달이 미뤄지게 됐다. 엘레베이터 회사의 내부 사정(파업) 때문이란다. 


결과적으로 12월 출산예정인 나는 꼼짝없이 출산하러 계단을 내려가야만 하는 상황에 닥쳤다. 양수가 터지든 진통이 가진통이든 진진통이든 무조건 계단을 내려가야만 한다. 병원 담당의는 "진통을 겪으면서 계단 내려오는 건 위험할 수 있다"며 "상황을 보자"고 하셨다. 


공사일이 미뤄지면서 생긴 더 큰 문제는 아무리 산후조리원에서 2주를 보내고 온다 할 지라도 집에 올 때는 계단을 이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출산으로 인해 관절과 연골이 벌어질 대로 벌어진 상태에서 한 두 층도 아닌 계단을 올라야 되는 상황. 


보건소에서 진행하는 '산후조리' 교육에서는 '출산 한 달 이후부터 가벼운 산책이나 걷기 운동을 시작하라'고 했다. 강사님께 현재 내 상황에 대해 조언을 구하자 "오, 안 돼요. 안 돼. 남편이 산모님 업고 계단 오르는 거 아니고선 절대 위험해요. 몸 다 망가집니다"라고 하셨다. 


최후의 수단은 차로 2시간 이상 걸리는 부모님댁이 아닌 1시간 이내에 있는 시가에 가는 방법인데 주변인 모두가 "그거 만만치 않게 불편할텐데"라며 만류했다. 


시가에서 몇 번 자고 온 적은 있지만 출산 후 회복이 전적으로 필요한 상황에서 시가에 머무르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할 것 같다. 그렇다고 조리원 퇴소 후 아기를 데리고 2시간 넘는 거리의 부모님댁을 가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이래서 신혼집은 친정과 가까운 데 잡으라고 하나보다) 


안전한 임신을 위해 모든 환경이 100% 완벽하게 조성되어도 모자랄 판인데('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거창한 표현까지는 가져다 쓰고 싶지 않다) 출산 전, 후로 큰 고비가 하나 생겼다. 


아무쪼록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길. 


























 

매거진의 이전글 임산부배려석에 앉은 사람에게 "임산부세요?"라고 말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