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Oct 31. 2021
임산부배려석에 앉은 사람에게 "임산부세요?"라고 말했다
임산부배려석에 임산부가 앉지 못하는 상황은 대한민국 임산부라면 누구나 겪어봤을 상황이다.
임산부로서 임산부배려석에 누가 앉는지를 지켜보았다.
결론은 청소년을 제외한 대한민국 남녀노소 모두다.
인터넷의 카더라처럼 반드시 아줌마, 할줌마, 젊은 여자들만 임산부 배려석을 차지하는 경우는 없고, 젊은 남자도 앉고(옆에 빈 자리가 많음에도), 외국인 남자도 앉고, 아저씨도 앉고, 할머니도 앉고, 할아버지도 앉는다. 자기 애를 임산부석에 앉히고 그 옆에 앉는 엄마도 있다.
대체로 청소년, 학생들일 경우에 임산부석에 앉는 경우가 극히 드물며(사실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부모가 자기를 임산부석에 앉히려 해도 끝끝내 거부한다. 한 번은 청소년 자녀 둘과 지하철을 탄 어머니가 주르륵 나란히 좌석에 앉기 위해서 아이들을 임산부석에 앉히려고 했다.
"얘들아 여기 앉아도 돼. 여기 앉아. 어차피 임산부 없어"라고 하자, 그 애들 둘은 "아 엄마 왜그래? 여기 임산부석인데 여길 왜 앉아. 아, 그냥 서서가"라며 어머니의 호의를 거절했다.
임산부 배려석 앞에 설 때마다 인류애가 파스스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그 느낌을 글로 남겼다.
https://brunch.co.kr/@rookieseul/32
브런치 글을 읽으신 한 분께서 '그냥 서 있지 말고, 임산부세요?'라고 물어보라고 댓글을 달아주셨다.
이 때만 해도 '이게 정말 가능할까? 나한테 도리어 뭐라고 하면 어떡하지'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극강의 분당선을 타고 출퇴근을 하는 임산부가 아니던가.
실전의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임산부 마크가 붙어있는 지하철 스크린도어 앞에 설 때마다 나는 항상 긴장상태다.
'자리가 비워져 있을려나? 또 분명 누가 앉아있겠지? 이 치열한 퇴근 시간대에 설마...'
지하철이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스크린도어 문이 열리자 임산부석을 향해 걸어갔다. 역시나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나는 지하철을 탈 때면 항상 임산부 뱃지를 팔목에 차기에, 뱃지를 가방에 차서 안 보인다거나 그런 일은 전혀 없다.
임산부석에 앉아 계시던 아줌마는 내 팔목에 걸린 임산부 뱃지를 봤다. 그런데 분명히 봤음에도 모른 척 시선을 피했다.
그 순간 용기를 내고 뭐고 할 겨를도 없이 입에서 말이 터져나왔다.
"임산부세요?"
내 질문에 아주머니는 아무 대꾸 없이 자리를 일어나셨다.
나의 질문에 불쾌해하거나 "네가 뭔데 물어보냐?"라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나는 누가 봐도 배가 나온 임산부였고, 상대방은 누가 봐도 임산부가 아니었기에 "임산부세요?"라고 물어본 것은 사실적시였다.
그렇게 자리를 양보(?) 받고 나자 임산부석에 앉은 사람의 시선에서 좌석 앞에 선 임산부의 배가 안 보일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앉은 사람의 눈 위치에서 배가 한껏 나온 임산부의 배는 보일 수밖에 없고, 더군다나 그 임산부가 가방이 아닌 손목에다가 뱃지를 차고 다니는 나같은 여자라면 더더욱 뱃지는 눈에 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지하철을 탈 때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덜해졌다.
임산부석에 앉은 사람에게 "임산부세요?"라고 물어보는 것이 무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리의 의미를 한 번 환기시켜주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됐다.
때로는 시간대와 상황에 따라 임산부배려석이 아닌 노약자석에 앉기도 했지만, 내 앞에 연로한 어르신들이 서 계신 것이 임산부로서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여섯 자리 밖에 없는 노약자석에 앉기 위해 대기하는 어르신은 생각보다 많으며 내가 일어나야 저 어르신이 자리에 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임산부가 노약자석에 앉았다고 일어나라고 호통치거나 임산부의 배를 발로 차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임산부배려석에 앉아 계실 때 그분들에게 "임산부세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지하철에 서 계신다고 해서 일반석에 앉은 사람들이 그분들에게 양보를 하는 미덕은 대한민국에서 사라진지 오래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임산부배려석에 앉았지만 앞에 선 임산부를 본체만체 하며, 임산부 뱃지를 본인의 두 눈으로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하는 신체 건장한 분들을 향해 물어본다. "임산부세요?"
아직까지는 0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