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리스리 Jul 14. 2021

임산부 배려석 앞에 서면 인류애가 사라져요

임산부가 되고서야 달라보이는 임산부 배려석

솔직히 인정한다. 미혼일 때 임산부 배려석 많이 앉았다.


단, 임산부가 앞에 서면 바로바로 자리를 비켜 드렸다. 민망해하면서.


그런데 임산부가 되어보니 알겠더라. 임산부 배려석은 '그냥' '무조건' 비워두는 게 맞다.


임산부 뱃지를 받고 처음으로 지하철을 타던 날, 남편과 함께 지인의 결혼식장에 가는 날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임산부 뱃지를 가방이 아닌 손목에 찼는데, 미혼 때 어떤 임산부께서 손목에 차고 다니는 것을 본 이후로 '획기적이다. 저거라면 도저히 못 볼래야 못 볼 수가 없잖아. 나도 임신하면 꼭 해봐야지'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초기 임산부이기에 배는 나오지 않았던 터. 자리 양보 안 하기로 유명한 분당선을 타고 서울로 가는데 임산부 배려석에 누가 봐도 나처럼 결혼식장에 가는 것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이 앉아계셨다.


남편과 나는 임산부 배려석 앞에 섰지만 그 분은 나의 뱃지를 보는 척 마는 척 했다. 아니 솔직히 보고 있었다. 빤히.


수 정거장을 지나도 중년남성이 비켜주지 않기에 나는 남편에게 "저기 노약자석 비어서 저쪽으로 갈래"라고 했고, 노약자석에 앉아 그 자리가 어떻게 되는지 한 번 켜봤다.


손목에 임산부 뱃지를 단 임산부가 서 있어도 무시했던 중년남성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할아버지가 탑승하자 그 분께 임산부 자리를 내어드렸다.


결혼식을 오고 가는 동안 임산부 배려석 앞에 모두 섰지만 양보를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남편은 양보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분개했다. 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부인이 이런 처지인 것을 직접 눈 앞에서 목격하남편과 똑같은 반응이겠지.




지하철을 타는 일이 생길 때마다 인류애는 점점 사라졌다. 백이면 백 임산부 배려석을 양보 받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아주머니(보통 인터넷에서 할줌마라고 하더라)들은 딸이 있으실 법도 하고 며느리가 있으실 법도 한데 임산부 뱃지를 모른 척 하셨다. 그저 바라보거나, 본인이 내릴 정거장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눈만 감으실 뿐.


 때마다 자리를 양보해 준 분들은 임산부 바로 옆에 앉은 젊은 승객이었다.


임산부 배려석 바로 옆에 앉으신 분들에게 자리 양보를 받을 때 루틴은 비슷했다.


1. 임산부 배려석 옆자리이신 분이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사람을 빤히 쳐다본다.

2. 쳐다봐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사람은 반응이 없다.

3. 임산부 배려석 옆 좌석 승객이 "여기 앉으세요"라고 자리를 양보해주신다.


그러면 나는 그때마다 누구보다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며, 뻣뻣한 태도가 아닌 "감사합니다"라며 한껏 상반신을 숙이며 인사한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사람도 같이 들으라는 듯이. (물론 그들은 아무 반응도 없다)




임산부가 임산부 배려석에 앉지 못하는 일이 몇 번 생기고 나면 마음 속에 언젠가부터 지하철 타는 일이 '챌린지'가 되어 버린다.


과연 오늘은 양보 받을 수 있을까? 아닐 걸? 오늘도 실패일 걸


'임산부 배려석' 스티커가 붙은 스크린 도어 앞에 서서 "오늘은 과연..." 이러면서 기다려보지만


매번. 무참히. 참패한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표신된 임산부 배려석 위치


이런 경험이 몇 번 쌓이다 보면 아예 처음부터 임산부 배려석은 포기하게 된다.


지하철이 정차하기 전에 임산부 배려석에 누가 앉아있는 게 보이면 재빨리 옆옆 칸의 노약자석 탑승 위치로 가거나(확률상 임산부 배려석 양보 받을 확률보다 노약자석에 자리가 비었을 때 앉을 확률이 더 높다)


아니면 바로 옆 스크린도어(보통 임산부 배려석은 지하철 좌석 양끝에 있기 때문에)로 자리를 옮겨 본다.


실제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임산부 배려석 서 있다가 기분 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아예 뱃지를 안 들고 탄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임산부 배려석에 관한 임산부들의 증언은 넘쳐난다.


임산부가 아니더라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는 일반인 꼴보기 싫다'는 글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내용인즉슨 '내가 괜히 임산부석을 비워두고 서서 가는 게 아닌데 왜 일반인인 네가 앉냐'는 것이다.


나 또한 임신 전에는 그랬다. 좋은 마음으로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두고 가는데 다음 정거장에 탄 누군가가 홀라당 그 자리를 앉아버리면 "한 시간 넘게 가는 나도 일부러 안 앉는데 저 사람 뭐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임산부 배려석에 관한 글은 반드시 맘카페가 아니더라도 넘쳐 난다.




임산부 배려석을 놓고 임산부끼리 벌여야 하는 경쟁도 애처롭다.


지하철을 탔는데 임산부 배려석에 다른 임산부가 앉아있으면 그 분이 내리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특히나 출퇴근 시간대에는 사람들로 지하철이 가득차 다른 임산부 배려석으로 이동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한 번은 임산부 배려석이 아닌 일반석에 앉아 퇴근을 하고 있었다. 내 맞으편 양쪽 임산부 배려석에는 한 명은 임산부가 다른 한 쪽은 일반인이 앉아 있었다. 임산부가 앉아있는 좌석 쪽 출입문으로 다른 임산부가 탔는데 그 분 또한 배가 꽤 나와 보이셨다. 하지만 본인 앞에 임산부가 앉아있으니 그 분은 쭉 서서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계속 양쪽 임산부 배려석을 주시했는데 몇 정거장을 지나자 다른 쪽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던 일반인이 내렸다. 그리고 참 운이 좋게도 그 임산부 배려석은 계속 비워진 채로 몇 정거장을 지났다.


그런데 인파가 너무 많기 때문인지 임산부 배려석 앞에 서 계신 임산부는 반대쪽 임산부 배려석이 비워진 지 미처 모르고 계신 것 같았다. 나는 너무 안타까워 타이밍을 계속 재다가 그 분께 손을 주욱 뻗었다. (지금 바로 내릴 것도 아닌데 내 좌석을 사수하면서 인파를 뚫고 누군가의 어깨를 치는 일은 너무 어렵다)그 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반대쪽 임산부 배려석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임산부는 고마워하시며 반대쪽 임산부 배려석을 향해 가셨고, 마침내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지하철에 이 포스터가 붙어있으면 뭐하니..



더 걱정되는 건 앞으로다.


지금은 20주를 넘지 않은 초,중기 임산부라 아직은 지하철에서 서서 가는  부담이 조금 덜 되지만, 배가 더 나와서 정말 서 있기도 힘든 때가 오면 '내가 과연 자리를 양보 받을 수 있을까' 걱정이다.


이미 너무 많은 사례를 통해 임산부가 임산부 배려석에 앉지 못 하거나 양보 받지 못하는 상황을 보았고 내가 겪었기 때문이다. 미혼 시절, 직장 동료가 만삭 직전의 몸으로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아저씨에게 자리를 양보받지 못하는 걸 두 눈으로 목격한 이후로 '저 일이 곧 내 일이 되겠구나'라고 실감했다.


그리고 그 일은 현실이 되어 현재 나와 같이 임신 중에 있는 직장동료와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면 "인류애 진짜 사라지지 않냐"고 입을 모은다.


그래도 감사한 건 가뭄에 콩 나듯, 사막 속에 오아시스를 만나 듯 자리를 양보해주시는 분들 덕분이다.


한 번은 임산부 배려석에 한 여학생이 앉아있었다. 여학생 무릎에 누가 봐도 무거워 보이는 배낭이 놓여져 있었기에 나는 당연히 '저 여학생이 자리를 양보 안 해줄 것이다'라고 단정 짓고는 그 여학생 앞에 서는 것을 포기하고 반대편에 다. (무엇보다 임산부 배려석 앞에 다른 승객이 손잡이 잡고 서 있으면 그 사이로 치고 들어가는 것도 어렵다)


그런데 몇 정거장 지나서 다른 임산부가 그 여학생 앞에 서자 그녀는 무거운 배낭을 얼른 들쳐매고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아 저럴 줄 알았으면 내가 저 여학생 앞에 설 걸. 뭐야...저 임산부는 나보다 훨씬 늦게 탔는데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서 편히 가고..'


나는 '이대로 쭈욱 서서 가겠구나'하고 마음 속으로 투덜투덜 댔다.


그 여학생도 퇴근길 인파에 치여 어느새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오게 되었는데 왠지 모르게 내 임산부 뱃지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여학생도 서서 가고 나도 서서 가는데 내가 서 있는 좌석은 자리가 나지 않는 반면 그 바로 옆 자리, 옆옆 자리는 계속 누군가가 내리면서 좌석이 비었다.


누군가 내심 양보해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퇴근길의 분당선은 어림 없지.


내 옆옆 자리가 다시 비었지만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당연히 앉겠거니 하고 서 있는데 그 여학생이 나섰다.


"저기 저 분이 임산부인데 자리 좀 앉아도 될까요?"하면서 방금 자리가 난 좌석 앞에 선 아줌마에게 나 대신 양해를 구하는 것이었다.


서 계시던 아줌마는 "어머, 나는 금방 내려요"하셨고, 그 여학생이 길을 터준 덕분에 나는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나는 너무 고마운 마음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하면서 양보받은 좌석에 앉았다. 방금 전까지 투덜거리던 마음은 사라지고 자기 몸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서 있는 그 여학생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그 분께 할 수 있는 건 "배낭 좀 제가 들어드릴까요?"라고 묻는 것과 감사의 뜻으로 가방 안에 있던 쿠키를 건네는 일이었다. 실제로 많은 임산부들이 가방 안에 과자나 초코바 등을 넣어가지고 다니다가 자리를 양보해준 분한테 전달한다는 인터넷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이 시간에도 어딘가의 지하철에서 임산부 배려석에 앉고 싶은 욕구를 참고 자리를 비워두시는 분들과 서 있는 임산부에게 기꺼이 자리를 양보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


출산 후에 임산부 뿐만 아니라 보다 힘들어보이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분이라도 자리를 적극적으로 양보하리라.




이전 06화 임신이 되었다. 과배란 3회차 만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