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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리스리 Jan 22. 2022

출산 최악의 코스라는 자연분만 시도 후 제왕절개

제왕절개는 자궁절개로 이름을 바꿔야 한다. 반드시 


"너무 아프면 어떡하지? 나 잘할 수 있을까? 인생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일텐데 흑흑"


출산을 앞두고 (모두가 그랬듯이) 출산과정에 대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남편은 그런 나에게 "다른 사람들도 다 낳는데 자기라고 왜 못하겠어~ 잘 할 수 있어"라며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이것은 나의 이런 예상을 처절히 깨부순 출산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다큐 3일'까진 아니지만 <출산 3일>에 관해 써보자. 


(※ 출산 과정을 메모나 기록 없이 나 혼자 온전히 다 기억하기란 무리였으므로, 내 옆에서 나의 고통을 지켜본 남편과 타임라인을 맞춰보았음을 밝힌다)




<12월 10일(금) 오후> 

- 아기는 나올 생각이 없네. 코로나 검사나 받자. 

이때까지도 출산의 징조는 없었다. 이미 예정일에서 +3일이 지난 날짜. 


예정된 병원 진료를 가니 의사 선생님께서는 "다음 주 월요일에 유도분만을 하자"고 하셨고, 간호사는 월요일 유도분만에 앞서 준비할 사항들을 설명해주었다. 


병원에서는 코로나 검사결과의 유효기간을 3일 정도로 보기 때문에 오늘이나 내일 보건소에 가서 배우자와 함께 검사를 받아오라 했다. 


'임산부 보건소 코로나 검사'에 대해 검색하니 임산부의 경우 긴 줄을 서지 않아도 빨리 검사를 받을 수 있게 해줄 수도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동네 보건소에 가니 엄청난 인파가 길게 줄을 늘어선 상황. 남편이 안내를 해주시는 분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임산부의 경우 줄 서지 않고 받을 수 있게 안내해주셨다. 단, 남편은 줄을 서시라는 말과 함께. 


남편은 오늘 당장 애가 나올 수도 있는 점, 임산부뿐만 아니라 보호자도 같이 코로나 검사를 받은 상태여야 병원 분만실에 들어갈 수 있는 점 등을 언급하며 코로나 검사를 임산부와 같이 빠르게 받을 수는 없는지 더 직급이 높은 관리자에게 문의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긴 줄을 서지 않고 5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코로나 검사를 마쳤고, 남편은 40여 분을 줄 서서 기다린 끝에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출산 예정일을 훨씬 지났기에 아기 나오는 데 일부러 도움되라고 보건소까지 걸어간 거였는데. 남편이 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뱃 속의 아기에게 말을 걸며 보건소 근처를 배회했다. 


이때는 몰랐다. 

산부인과에서 '코로나 검사'를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받으세요"라고 할 때, 오늘 받기를 잘했다는 사실을. 


<12월 10일(금) 저녁> 

- 똥 싸고 싶은 통증 뒤에 양수가 흐르네


집에 와서 남편과 함께 저녁을 준비하는데 요리를 하는 동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떤 블로거 분이 '똥 싸고 싶은 통증'이라고 표현한 그 증상. 

누가 들으면 '똥 싸고 싶은데 왜 통증이야?' 싶겠지만 정말 그 기분이다. 서 있으면 못 견디겠고 화장실 변기에 가서 앉아있으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은 그 통증. 


저녁을 요리하다 말고 나는 남편에게 "안 되겠어. 나 화장실에 갈게"라고 말하고 욕실로 향했다. 

변기 위에 앉아 계속 끙끙거리면서 고민했다. 이것은 똥인가 통증인가. 


하지만 이건 단순 똥이 아니다. 똥 마렵다고 통증이 여러 차례 걸쳐서 오진 않으니까. 


며칠 전부터 계속된 이 증상 때문에 자다가 깨기도 일쑤였다. 똥 마려운 기분 때문에 새벽에 여러번 깨어본 적 있는가. 


그런데 이날의 통증은 좀 달랐다. 똥 마려운 통증인데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힘겹게 저녁을 겨우 먹고 나서 안방 침대로 걸어갈 힘마저 없었던 나는 (일어서면 똥 나올 것 같은 통증 때문에) 거실 바닥에 누워 끙끙거렸다. 


통증이 올 때마다 거실 테이블 다리를 붙잡고 거친 숨을 몰아내기를 여러 차례. 남편은 "지금이라도 침대로 가자"라며 나를 부축했고 겨우겨우 침대에 몸을 눕혔다. 침대에 올라가는 것마저 힘들어서 남편의 도움을 받아 누운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따뜻한 무언가가 가랑이 사이로 주르륵 흘렀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 싶어' 남편에게 얘기하지 않고 그냥 누워있었다. 그런데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주르륵'. 


남편을 불러 "여보, 이거 오줌 아니겠지?"라며 속옷을 적신 그것의 냄새를 맡아봤다. 킁킁. 

오줌이 아님을 확인하고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이미 출산가방은 며칠 전부터 자동차 트렁크에 실어놓은 터. 


병원은 차로 5분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였지만 저녁 내내 참았던 통증은 이때다 싶어 더 심해졌다. 


병원에 도착하니 양수가 흐른 게 맞았고, 아직 자궁문은 1cm도 열리지 않았다고 했다. 자궁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입원수속을 하고 병실에 있다가 다음 날 오전에 다시 내진을 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리고 내 왼쪽 팔목에는 두꺼운 주삿바늘이 끼워졌다. 


윽.. 주삿바늘은 진짜 두꺼웠다. 무언가 대바늘로 살을 쿡 찌르는 듯한 느낌. 간호사 선생님은 출산할 때까지 계속 주삿바늘을 꽂아놓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오른쪽 팔에는 또다른 주사를 놓았는데 부작용으로 메스꺼움이나 구토가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12월 11일(토) 자정 ~ 새벽 2시> 

출산 3대 굴욕이라는 '관장'을 하다 


병실에 누워 다음 날 아침까지 아무 일도 없었으면 정말 좋았겠지만 진통은 시간이 흐를수록 세졌다. 

남편은 짐을 추가로 챙겨오기 위해 잠시 집에 다녀오기로 하였고, 나는 그 시간 동안 당연히 거뜬히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고통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고, 남편이 돌아오자마자 나는 토를 하였다. 아까 분만실에서 맞은 주사의 부작용이었다. 


비닐봉지에 쉴새 없이 게워내는 나를 보고 남편이 울기 시작했다. 내가 눈앞에서 힘들어하는데 자신은 아무 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는 남편을 달래며 "괜찮아, 괜찮아"라고 했다.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분만실로 다시 내려간 시간은 새벽 1시. 간호사는 "무통주사는 최소 3~4cm 열려야 놓아드릴 수 있는데 너무 아파하시니까 지금 놓아드릴게요"라며 관장을 했다. 


'출산 3대 굴욕'(관장, 제모, 내진)이라고 불리는 관장을 하는 데 있어 거부감은 없었다. 진통으로 인한 고통이 더욱 더 컸던지라 관장을 순식간에 끝내고 화장실에 가서 큰 볼 일을 보고 무통주사를 맞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렸을 때 이후로 누가 내 엉덩이에 관장을 한 기억이 없는데 성인이 되어 당한 관장은 굴욕이랄 것도 없이 의료목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지나가버려 '아, 이게 관장(의 느낌)이었지' 싶었다. 


관장 후에 화장실 변기에 앉으니 벽에 '현재 하시는 관장은 아기를 만나기 위한 과정 어쩌구 저쩌구'라는 문구의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그 스티커를 바라보며 '분만 시에 똥이 나오진 않겠지. 똥은 제발 같이 나오지 말아라'하는 마음으로 내 대장을 온전히 비우는데 집중했다. 


무통주사를 놓아주실 마취과 선생님이 오시길 기다리는 동안 임신 웹툰('아기 낳는 만화') 및 책 등을 통해 배운 지식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무통주사가 척추 어딘가에 꽂는다던데... 대체 척추에 주사를 맞는 기분은 어떤 걸까. 나 쇼크 일으키는 거 아닐까


다행히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전문가 선생님의 손길에 의해 내 등 어딘가에 주사가 쓰윽 놓아졌다. 


무통주사의 효과는 빠르게 나타나기 시작해 나는 잠시 고통을 잊고 스르르 잠이 들 수 있었다. 내가 잠이 들려 하자 간호사는 남편에게 "입원실에서 주무시다가 '오전 7시'에 분만실로 오시라"라고 하였다. 나 역시 남편이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기 바라는 마음이었기에 남편에게 내 걱정은 말고 잠시라도 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도 주사 기운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무통주사의 효과가 그렇게 짧게 지속될 지는 꿈에도 모르고. 



<12월 11일(토) 새벽 4시~ 오전 6시

- '무통주사'의 효과는 겨우 두 시간. 누가 무통을 천국이라 말했나


고통 없이 잠드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다시 스멀스멀 느껴지는 진통에 잠이 깼고, 코로 숨을 들이쉬고 입으로 내쉬며 고통을 견뎠다. 몸이 배배 꼬아지는 걸 참아가며 숨 쉬기를 30분~1시간 정도 했다고 느껴졌을 때 정말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겠다 싶어 간호사 선생님을 불렀다. 


"선생님, 저 너무 아파요." 


나의 부름에 오신 간호사 선생님은 정말 진심으로 내 고통에 공감해주시는 것처럼 보였다. 진통을 느끼는 가운데에도 목이 바짝바짝 타 들어갈 것만 같아서 선생님께 물을 부탁했고, 선생님이 정수기에서 떠다주신 물로 목을 축였다. 


새벽 두 시에 잠든 이후에 최소 한 시간을 무통주사의 약효에서 깨어나 침대 위에서 몸부림 쳤으니 나는 최소 새벽 5시는 되었을 줄 알았다. 시간을 묻는 내게 간호사 선생님은 '새벽 4시 30분'임을 알려주셨고, 그 말인즉슨 내일 오전 내진 전까지 내가 최소 3시간은 혼자 버텨야 함을 의미했다. 


내가 진통으로 인해 갈수록 힘들어하자 간호사 선생님은 "남편분을 부를까요?"라고 물어봤다. 그러나 남편을 불러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내 모습을 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잠이라도 짧게나마 청하는 게 더 나은 선택 같았다. 


그러자 간호선생님은 통증을 완화할 목적으로 '짐볼 운동을 하는 게 어떻겠냐'며 나를 체력단련실 같은 곳으로 데려가셨다. 출산을 위한 짐볼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간호사 선생님이 짐볼을 이용한 출산에 도움되는 동작을 알려주셨다. 그런데 짐볼에 기대어 엉덩이를 뒤로 빼거나 짐볼 위에 앉는 자세 모두 내 진통을 강화시킬 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까 마신 물이 역류했다. 나는 급하게 귀 양쪽 끝에 비닐봉지를 걸고 '웩웩' 거렸다. 간호사 선생님이 내가 토할 수 있도록 등을 두들겨 주는데 정말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선생님께서 내가 토한 비닐봉지와 흔적을 치워주시는 사이 나는 요가매트 위에 쭈그리고 앉아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다리를 삼각형으로 벌리고 상체를 매트에 납작 엎드렸다. 임산부 요가 영상에서 많이 하던 자세였다. 같은 자세로 쭈그리고 엎드리는 게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이 자세 말고는 고통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목표는 오전 6시까지 버텨내다가 내진을 받는 것이었지만 5시 30분에 포기했다. 


"선생님.. 선생님.. 저 너무 아파요" 


<12월 11일(토) 오전 ~ 출산 직전

- "그만하고 싶어요" "살려주세요"가 절로 나오는 시간 


간호사 선생님은 무통주사의 투입량을 늘리셨다. 분만 직전에 투입량을 늘리면 무통주사로 인해 힘을 줘야 할 때 제대로 못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지금 미리 주사량을 늘려놓고 자궁문이 점점 더 열릴 수록 투입량을 줄여야 한다고 하셨다. 몸 속으로 들어온 무통주사의 약효 덕분에 나는 잠시나마 다시 또 편해졌다. 


그 사이 남편이 분만실로 왔다. 남편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인지 피곤해보였다. 무통주사의 효과가 온몸에 퍼져나갔다. 남편의 보호 아래 잠시 눈을 붙였다. 


회진을 온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는 '늦어도 오후에는 아기가 나올 거다'라고 하셨다. 간호사 선생님은 나에게 침상에 누워있는 동안 계속 옆으로 돌아누우라고 했다. (옆으로 돌아누우라고 한 이유는 분만 직전에서야 밝혀진다) 


"남편분과 짐볼 운동 하세요."

간호사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남편과 짐볼 운동을 시작했다. 


임산부 시절 오전 9시 진료 시간 이전에 병원을 방문하게 되면 분만실로 안내를 받게 되는데, 이때 남편과 아내가 함께 서로 손을 잡고 짐볼 운동을 하는 모습을 지나가며 본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운동을 하고 있는 아내와 남편의 모습이 평온하고 다정해보였는데 실상 내가 겪어보니 이건 마지막 출산 스퍼트를 위한 부부의 협동작전이었다. 


남편의 도움 아래 짐볼 운동을 하고 나자 다시 내진 시간이 찾아왔다. 수차례 진행되는 내진이 임산부에게 굴욕이라지만 진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내진을 끝낸 간호사는 분만유도제를 투여하며 말했다. 

"이제 진통이 더 심해지실 거예요. 남편분과 호흡하셔야 해요". 


분만유도제의 효과는 엄청났다. 누군가가 진통은 파도와 같이 왔다가 사라지고의 반복이라고 했는데 정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게 무슨 뜻이지? 파도라니' 싶었는데 정말 진통은 파도와 같았다. 

몇 초 단위로 진통이 왔다가 가고, 다시 금새 진통이 찾아오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남편은 내 옆에 놓여진 기계의 그래프를 보며 내가 힘을 줘야할 타이밍을 알려주었다. 진통이 피크를 찍을 때 똥을 싸듯이 힘을 줘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고통이 무한반복되는 곳은 지옥이 아니라 분만실에 있었다. 온몸으로 고통을 겪어내는 가운데 노역하는 임무를 받은 노예마냥 고통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힘을 줘야 한다. 


"자, 온다 온다". 남편은 내가 호흡을 놓치지 않고 적절하게 힘을 줄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왔다.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내가 의지할 건 남편밖에 없었다.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을 잡는다는 심정으로 남편의 다리를 쥐어짜내듯이 붙잡으며 힘을 줬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때마다 정신을 차리고 똥 싸듯이 힘을 주는 건 곡예에 가까웠다. 

그 사이 6~7cm였던 자궁문은 10cm까지 열렸고 드디어 내 입에서는 '못 하겠어요. 선생님 살려주세요'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내 입에서는 '못 하겠어요. 선생님 살려주세요'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간호사 선생님은 "아직 아기 머리가 1cm밖에 안 나왔어요. 3cm 열릴 때까지 더 힘 주세요"라며 30분 더 힘 줄 것을 주문했다. 


30분...방금까지도 죽을 듯이 힘들었는데 30분을 더 하라니. 지옥문 하나를 빠져나왔더니 또 다른 지옥문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30분이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질만큼 '끝나라.. 제발 끝나라 이 고통아'라는 심정으로 힘 주기를 반복했다. 

이 때부터는 내 정신이 내 것이 아니게 된다. 고문 당하는 사람의 기분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을 정도로 누군가 내 몸을 사정없이 고문하는데 정신줄을 붙들어매야 한다. 


몇 분이 흘렀는지 시간을 묻는 내게 남편은 "지금까지 잘 했어. 조금만, 조금만 더 해보자"라며 진통에 맞춰 힘주는 것을 놓치지 않도록 했다. 


"못하겠어요" "살려주세요"가 입에서 절로 나오는 가운데 간호사 선생님은 이번에는 양쪽 다리를 붙잡고 힘을 주라고 했다. 


'분만이 이런 자세라고 왜 누구도 말을 안 해준 거야' 싶을 정도로 요가자세처럼 양쪽 다리를 붙들고 고개를 들어 힘을 줘야 하는 자세는 너무 힘들었다. 나는 흐느끼며 "선생님 수술할래요. 수술시켜 주세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12월 11일(토) ~ 수술대 가기 직전 

- 10시간 이상 진통한 결과가 제왕절개 수술대라니 


힘 주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내 배를 눌러보는 간호사 선생님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두 명의 간호사 선생님은 그들만의 언어로 무언가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용어는 한마디도 없었지만 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건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담당 의사 선생님을 호출했고 내 옆에는 초음파 기계가 놓였다. 


물론 이 순간에도 나는 계속되는 진통 속에 살려달라는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절대 이 글처럼 분위기가 차분하거나 침착하지 않았다) 


지난 몇 주간 내 진료를 담당했던 의사 선생님의 반가운 얼굴이 등장했지만 표정과 분위기는 심각했다. 초음파를 보더니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이걸 왜 이제야 얘기한 거야"라고 호통쳤고(아마도), 간호사 선생님들은 "최대한 아기 위치를 바꿔보려고 했는데..(중략)"라며 나를 계속 옆으로 돌아눕게 한 이유를 설명했다. 


의사 선생님은 "지금 바로 수술 들어갈게요. 자연분만으로 아기가 나올 수가 없어요"라며 남편을 따로 불러 수술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그 사이 나는 간호사 선생님들이 물어보는 말에 답변했다. 페인버스터를 사용할 것인지(페인버스터가 뭔지도 모르고 '네'라고 했다)부터 기타 동의 항목에 대해 무조건 다 "네"라고 했다. 

아파 죽겠는데 찬물, 더운물 가릴 정신이 어디 있나. 



<수술대 ~ 출산

- 마취에서 덜 깬 엄마는 아기 얼굴을 보고 울었다 


수술에 대한 동의가 끝나자 나는 재빠르게 들 것(?)에 실려 수술실로 옮겨졌다. 

너무 아파서 정신이 없는 가운데 수술실 문이 열리자 대략 10여 명의 의료진들이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의료진 수에 놀랐다) 


하반신 마취를 먼저한 후에 상반신 마취를 할 것이라는 간호사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졌고, 

나의 하반신에선 그 누구보다 빠른 손놀림으로 음모 제거가 이뤄지고 있었다. 


너무 무섭고 아프고 정신이 없는 가운데 하반신 마취가 이뤄졌고 짧은 시간이지만 공포가 밀려왔다. 


출혈이 많아서 내가 정신을 잃으면 어떡하지. 복부 어디부터 절개가 들어가는 걸까 내 배와 자궁은 무사할까 

간호사 선생님은 "산모님, 수술 후에 아기 얼굴 확인하실 거예요. 아기 얼굴 보실 거죠?"라고 물어봤고, 나는 이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채 "네네" 했다. 


정신이 아득해진 후 간호사가 나를 깨우는 소리와 아기 울음 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기를 낳았구나. 

마취약에 취한 엄마는 그렇게 아기 얼굴을 보고 울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의사선생님과 간호사들의 대화소리가 들렸다. 수술에 관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그들만의 수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수술이 끝난 것임에는 분명했다. 


남편의 증언을 빌리자면 내가 수술실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아기가 나왔고, 나머지 대부분의 수술 시간은 수술부위를 봉합하는 데 걸렸다. 


10시간 넘게 진통을 해도 안 나오는 아기였는데 수술실에 들어가자마자 아기가 바로 나오니 남편은 꽤나 놀랐다고 한다. 


자궁을 절개해서 아기를 빼내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지만 절개된 엄마의 자궁과 배를 봉합하는 데는 긴 시간이 소요되는 게 자궁절개 수술이었다. 


제왕절개(Cesarean section, C-section), 이 단어에 내가 속고 말았다. 


성노예라는 단어 대신 '위안부'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그 충격이나 효과가 감소되듯이, 제왕절개 역시 복부절개 혹은 자궁절개라는 말 대신 '제왕(帝王)'이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완전히 그 공포감을 제거했다. 


어원이 카이사르 왕에게서 비롯된 것이건 라틴어 'Cedare'에서 유래되었건 간에 출산의 고통을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늗네 일조하는 데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수술이 끝나고 남편에게 말했다. 


"제왕절개는 자궁절개라고 이름을 반드시 바꿔야 해. 그리고 둘째는 없어" 


사람들은 출산의 고통이 아기를 보는 순간 잊혀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마도 사람이다. 


태어난 아기가 예쁜 거와 산모가 아픈 거는 별개다. 출산의 기쁨이 내 하복부의 고통을 씻어주진 않는다. 


내 배를 찢어서 나온 아가야, 세상에 나온 걸 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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