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아파트 동대표를 하고 있다.
아기 출산예정일이던 달에 아파트 동대표 공고가 났고, 그 전부터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에 이런 저런 불만이 많던 나는 아파트 동대표 모집공고에 지원을 했다.
툭하면 "동대표한테 물어봐야 해요"라고 하던 관리사무소, 일반 입주민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뭐라도 직접적인 목소리를 내고 싶어 지원한 자리였다.
아파트 동대표가 되고 나서는 회장, 감사, 총무를 선출하는 과정이 있는데 나는 '감사'에 지원을 했다.
첫 동대표라고 해서 회장직에 지원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또 그 특유의 몸사림이 발동하여 회장이 아닌 감사를 지원한 것이다.
관리소장은 내가 애엄마라고 생각했는지 나를 굉장히 쉽게 봤다.
"와서 까까값이나 벌어가세요"하면서
아파트 동대표 감사가 할 일이 없다는 둥,
뭔가 내가 대충 일하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언론사 기자로 일했던 내가 과연 그러겠는가. 아파트 동대표가 되고 나니 그동안 아파트가 얼마나 관리소장의 놀음에 놀아났는지가 너무 여실히 보였다.
1년에 한 번 하는 외부회계감사 5년치를 쭉 뽑아서 보니 매번 같은 업체가 선정되어 "문제 없음"이라고 모든 걸 지적 없이 넘겼고, 관리소장은 이 아파트에서 7년 이상 머물면서 동대표들을 자신의 하수쯤으로 여기며 모든 일을 자기 맘대로 해오고 있었다.
이전 기수에서 장충금 없이 무리한 엘레베이터 공사를 진행했던 것도 드러났고, 내가 속한 동대표 기수가 출범하자 "올해 공사할 게 너무 많다"며 외벽칠 공사를 해야 한다는 둥, 자전거 보관소 캐노피를 공사해야 한다는 등 수많은 공사거리를 가지고 와서 동대표들이 의결해줄 것을 강요했다.
관리소장이 공사를 추진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업체로부터 받는 사례금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엘레베이터 공사만 해도 수천만원이 떨어진다고 하니 이 관리소장은 이미 엘레베이터 공사를 통해서 그 맛을 톡톡히 봤고, 이제는 이번 기수의 동대표들을 통해서 외벽칠 공사 등 자기 주머니에 돈이 많이 떨어질 공사들을 밀어부치는 것이었다.
관리소장이 내가 동대표를 지원한다고 관리사무소를 찾았을 때 두 팔 벌려 환영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동대표에 지원했을 때 유일하게 우리 동만 후보가 두 명이 나왔는데 다른 후보자는 이전 기수에서 '감사'를 맡았던 분이었다.
관리소장은 내가 동대표를 지원한다고 하자 "내가 하는 일을 다 못하게 막는다. 공사를 하려고 하면 다 훼방을 놓는다"라며 그 감사님을 심하게 흉을 봤었다. 자기가 공사로 한 건 크게 해 먹어야 하는데 감사님이 올바른 지적을 하며 공사를 연기하거나 미루게 하자 그 꼴이 보기 싫었던 것이다.
내가 동대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다른 후보자인 예전 감사가 기권을 했기 때문이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관리소장이 그분에게 따로 압박을 넣어서 포기를 종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젊은 사람 못 이긴다. 임산부 스트레스 주지 마라"는 식으로 압박하여 그 분이 스스로 후보에서 물러나게끔 만든 것이다.
나는 이런 관리소장을 좌시할 수 없어 그동안 그가 마음대로 해왔던 것들을 다 바로잡으려고 했다. 절차를 안 지킨 것에 대해서는 절차를 지키게 하고, 지적사항이 있으면 관리소로 찾아가 지적했다.
그때마다 관리소장은 "이런 얘긴 처음 듣는다. 누가 그러냐"며 아파트 관리규약상 마땅히 지켜야 하는 절차에 대해서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아파트 감사는 총 두 명이었기에 나 외에도 다른 한 명이 더 있었지만 그 아줌마는 겉으로는 내 편인척 하면서 뒤로는 관리소장과 내통하며 내 흉을 보고 있었다. 전형적인 일은 안 하면서 관리소 직원들한테 대접만 받고 싶어하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관리규약을 하찮게 여기고 감사의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관리소장 때문에 어마무시한 스트레스를 견뎌야했다.
허수아비 역할의 회장과 다른 감사, 거수기 역할에 만족하는 동대표들을 보며 인간에 대한 환멸도 많이 느꼈다.
아파트 동대표는 진짜 대충하면 너무 편하고 좋은데 제대로 일하면 할수록 병과 스트레스를 얻는 자리였던 것이다.
육아휴직 중에 애나 볼 것이지 아파트 동대표를 하면서 회사 다닐 때보다 더한 스트레스를 받는 내 자신이 싫어지기도 했다. 남편도 "육아휴직 했으면 쉬어야지. 왜 혼자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라며 안타까워했다.
완전 말 그대로 지팔지꼰이었다.
내게 힘이 되어줄 사람들은 네이버의 아파트 동대표 커뮤니티가 유일했다. 바른 아파트를 만들기 위해서 동대표들이 모인 그 카페에는 관리소장들이 동대표를 어떻게 눈속임하는지, 동대표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계약이나 산출내역서 정보 등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상세히 알려주는 곳이었다.
내가 글을 올리자 회원들은 "시에 신고해서 관리소장이 과태료를 맞게 하라"며 신고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관리소장이 절차나 규약을 안 지킨 사례는 차고 넘쳐서(살아있는 무법자라고나 할까) 아무 거나 하나 골라서 신고해도 바로 시에서 과태료 처분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말 관리소장의 만행 중 정말 고르고 골라서 딱 한 건에 대해서 신고를 했는데 과태료 처분이 나왔다.
과태료를 받은 소장이 나를 모함하고 다닌 건 당연한 수순. 악과 싸우고 있는 느낌이었다.
관리소장은 이전에 다른 아파트에서 과태료를 받은 것이 누적이 되어(다른 아파트에서 불미스럽게 우리 아파트로 쫓겨난 것이었는데, 이 아파트에서 거의 황제처럼 군림했던 것이었다) 결국 우리 아파트를 떠나게 되었다.
관리소장이 아파트를 떠나면서 모든 게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면 다행이지만, 원래 악 뒤에는 더 큰 악이 있는 법.
'지팔지꼰' 동대표 생활은 현재진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