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장 맥주는 공(空)이다.

by 원투텐OneToTen


아들과 나는 가끔 수원 야구장에 간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수원 야구장을 홈경기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KT의 팬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응원하는 팀이 없다.


야구장에 가면 우리는 항상 원정팀 응원석에 앉아서 나는 맥주를 마시고, 아들은 응원가를 따라 부른다. 우리에게 홈팀과 원정팀의 경기 결과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야구장에서 마시는 맥주를 좋아하고, 아들은 야구장에게 들리는 응원소리를 좋아한다.


올 한 해 4번 정도 수원 야구장에 갔었는데, 4번 모두 원정팀이 승리했다. 이 정도면 원정팀 승리 요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부자의 관람 방식은 기이하게 보일 것이다. 대다수의 야구팬들이 야구장에 가는 이유는 홈팀 또는 원정팀을 응원하고, 그들에게 감정이입하여 승리의 기쁨을 간접 경험하기 위함일 것이다.


승리 또는 패배로 나누어지는 결과에 유쾌하거나 불쾌한 감정을 얻게 된다. 응원팀의 승리로 유쾌한 감정을 얻게 되면 그 감정을 더욱 고취시키거나 유지하기 위해 승리를 갈망하게 된다. 응원팀이 패배하면 불쾌한 감정이 생겨나며, 그 감정을 희석시키기 위해 승리를 갈망된다.


승리와 패배 어느 쪽이든 갈망을 만들어낸다는 결과는 동일하다. 이런 갈망은 스포츠 산업을 지탱해 주는 다양한 방식의 소비(경제적 소비뿐만 아니라 감정적 소비도 포함)로 이어지고, 스포츠 산업의 영향력은 날로 커진다.




성경 창세기에는 '선악과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본인의 형상을 따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셨다. 에덴동산에서 지내게 된 아담과 이브에게 동산에 있는 다른 모든 과일은 따먹어도 되지만, 선악과만큼은 절대 따먹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뱀의 꾀임에 넘어간 이들은 선악과를 먹게 되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선악과 이야기'는 성경의 시작 부분에 수록되어 있을 만큼, 성경이 인류에게 전하고 있는 핵심 진리일 것이다.


선악과를 취함으로써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된 인간은 '좋고 나쁨', '크고 작음', '넓고 좁음', '나와 너', '내 편과 상대편', '아군과 적군', '부자와 빈자', '야당과 여당',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등등 수많은 흑백의 대상을 만들어내며, 모든 혼란의 재료를 제공해왔고, 계속 제공하고 있다.


야구장에서 어느 한 팀을 응원하며 생기는 결과와 마찬가지로 이분화되어 있는 생각은 결국 갈망을 형성한다. 갈망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을 더할 뿐이다.




사회가 소란스럽다. 소란이 커지면, 이분화되어 있는 생각도 함께 커진다. 피아식별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내 편이면 감싸고 내 편이 아니면 공격한다. 맥주 마시러 야구장에 오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맥주잔을 빼앗고 어느 쪽을 응원하러 왔냐고 윽박지르는 비상식적인 일도 서슴지 않으며, 오히려 미덕이 된다.


야구, 농구, 축구와 같은 대표적인 스포츠도 그렇고, 이념, 종교, 정치와 같은 전통적인 개념 또한 그렇다.

이분화되어 있는 모든 곳에는 승패와 관계없이 갈망만이 커지고, 날로 커지는 대중의 갈망을 통해 이익을 보는 집단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도덕경'에서 노자는 그릇과 바퀴를 예로 들며 공(空)을 설명한다. 그릇에 빈 공간이 있으므로 그릇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바퀴의 가운데 빈 공간이 있으므로 바퀴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물질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어떤 조건이 부합하여 발생하는 현상일 뿐, 그것의 본질은 좋고 나쁨이 없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끊임없이 커지는 갈망과 끊임없이 굴러가는 번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야구장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아래의 글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서 주인공인 싯다르타가 부처인 고타마에게 가르침을 얻고 떠날 때, 고타마가 싯다르타에게 전했던 이야기이다.


지식욕에 불타는 그대여,

덤불처럼 무성한 의견들 속에서

미로에 빠지는 것을,

말 때문에 벌어지는

시비 다툼을 경계하시오.

이런저런 의견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소.

의견이란 아름다울 수도 있고 추할 수도 있으며,

재치 있을 수도 있고 어리석을 수도 있소.

우리 개개인은 의견들을 지지할 수도 있고,

배척할 수도 있소.

그러나 그대가 나한테서 들은 가르침은

하나의 의견이 아니며,

그리고 그 가르침의 목적은

지식욕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설명하여 주는 것이 아니오.

그 가르침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소.

그 목적은 번뇌로부터의 해탈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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