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하지 맙시다.
10분,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주변을 살피고 상대를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기 딱 좋은 시간. 면접이든 미팅이든 사석에서 친구와 만나는 자리든 ‘10분 일찍'은 나에게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늦어서 미안!”이라는 말로 지각을 어물쩡 넘어갈 수 있는 시간 역시 ‘늦어도 10분'이다. (나와 같은 사회적 약속을 한) 상대가 십 분 일찍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10분을 늦어 버리면 상대는 20분을 기다려야 한다. 상대가 ‘고작' 10분 늦은 나를 나무란데도 유구무언이다. 20분은 결코 짧지 않다.
최근 생활비에 조금이라도 보태 보겠다고 집 근처 학원에서 조교 일을 한다. 전체 정원이 삼십 명 채 안 되는 작은 영어 학원으로, 대부분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다닌다. 나는 하루 네 시간 중 절반은 모니터 앞에 앉아서 교재 자료를 입력하는데 보내고, 남은 절반은 학생들 앞에 앉아서 시험 감독을 하며 보낸다. 시험은 주로 모의고사나 문법/단어 시험으로 이루어진 데일리 테스트를 보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모의고사는 1번이 듣기 시험으로 시작하다 보니 학생들이 모두 와야 시험을 진행할 수 있다. 그러나 여태껏 예정된 시간에 시험을 시작한 적이 거의 없다.
“5분만 기다려보고 시험 진행할게요.”라는 말을 오늘도 어김없이 했다. 세 명이 와야 시작하는 수업에 학생 한 명이 교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한 명으로 시험을 시작하긴 애매한 터라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5분이 조금 넘었을까. 학생 한 명이 슬그머니 들어왔다. 나는 서둘러 시험지를 나눠주고 듣기 파일을 재생했다. 9번 문제가 막 끝나고 넘어가는 타이밍에 남은 한 명이 왔다. 친구들이 듣기 시험을 보고 있지만 상관 안 한다는 듯 무심하게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를 드르륵 빼서 앉는다. 10번 문제가 되어서야 비로소 모두가 모였다. (이럴 경우 1번부터 9번까지 문제를 풀지 못한 마지막 학생은 시험 종료 후 다른 학생들이 채점을 하는 동안 듣기 지문을 다시 들려준다)
처음엔 나도 학교에서 보는 진짜 시험도 아니고 어차피 못 풀고 오답 처리하면 본인만 손해지, 싶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문제를 풀고 있는 학생들을 빤히 보고 있자니, 늦은 사람은 그다지 손해 볼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피해를 보는 사람은 일찍 온 학생들이었다.
고등학생 시험은 대부분 오후 6시 10분에 시작한다.(그것도 원래는 6시인데 학생들이 하도 늦어서 6시 10분으로 암묵적으로 굳어졌다) 일찍 와서 기다리는 게 습관인 학생들은 5시 50분, 늦어도 6시에는 학원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런데 '조금' 더 기다리다가 6시 15분에 시험을 시작하기라도 하면 일찍 온 학생은 25분을 기다려야 한다. 일찍 오기까지 더 쉬고 싶은 걸 참고 발걸음을 옮겼을 텐데 늦게 오는 친구들 때문에 그 노력이 헛수고라니.
버릇이 되고 성실하지 않다는 인식을 주고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지각이 나쁜 걸까. 그보다 먼저, 시간을 지킨 사람이 있기 때문에 지각이 나쁜 건 아닐까. 눈앞에 있는 학생들에게 '너도 늦으니 나도 앞으로 늦겠다, 나도 더 이상 손해보지 않겠다'는 마음이 행여나 솟아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