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안에서 생긴 일
평일 저녁, 엄마와 오래간만에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날이었다. 지하주차장에 겨우 남은 자리를 차지하고 올라가자 아파트 건물 현관 앞에 와이체어 두 개와 크고 작은 상자 몇 개가 쌓여 있었다.
“설마 저 멀쩡해 보이는 의자를 버리는 건가?”
“아닌 것 같은데? 여기다 짐 놓고 주차하러 간 거지 않을까?”
혹시 버리는 거라면 가져다가 쓸데없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순간, 한 아저씨가 우리를 뒤따라 주차장에서 올라왔다. 모두 저 아저씨 물건인가 보다. 일행이 없어서 짐들을 잠시 현관에 놓고 주차를 후다닥 하고 올라온 듯 보였다.
헐레벌떡 뛰어온 아저씨는 내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사이 짐들을 들기 편하게 차곡차곡 쌓았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부피도 꽤 컸는데 한 두 번 쌓아본 솜씨가 아니었다. 우당탕탕할 법도 한데. 나는 엄마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고, 뒤에 아저씨와 짐이 있다는 걸 등으로 느끼며 15층 꼭대기까지 올라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낯선 사람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1층의 공기는 엘리베이터 안만큼이나 왜 이리 어색한지.
“몇 층 가세요? “ 엄마가 물었다. 아저씨는 14층(어쩌면 15층)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계속해서 엄마와 얘기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아저씨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1층에서와 달리 몸짓이 부산스러운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8층에서 문이 열리고 우리가 내리려던 찰나, 아저씨가 대뜸 상자에서 무언가를 꺼내 엄마에게 건넸다.
“이거 가져가 드세요.”
와인이었다.
“예?! 아니에요! 저희 집 술 많아요! “
(사실이었다. 와인 마시는 사람이라곤 나뿐인 집에는 와인냉장고가 버젓이 있었고, 이 새로운 와인조차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와인 병을 잡은 채 한사코 거절하는 엄마와 눈도 쳐다보지 않은 채 괜찮다며 가족끼리 마시라는 아저씨. 결국 엘리베이터 문의 재촉까지 더해져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는 와인을 받아 들고 내렸다. 뭐지?
어리둥절했지만, 기분 좋은 어리둥절이랄까. 이웃들 얼굴을 나보다는 잘 기억하고 알아보는 엄마도 못 보던 아저씨라고 했다. 엄마는 아저씨가 엘리베이터에서 사부작거리길래 짐이 너무 많은가 보다 싶었다는데, 그중에 있던 상자를 북북 뜯어서 와인 한 병을 건넬 줄이야.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와인을 받고 나서야 엄마와 나는 ‘짐 좀 나눠 들어줄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나는 외투도 안 벗은 채 와인 라벨을 검색했다. 아싸 개이득. 다행히(?) 가격은 2만 원 대였다. 아니다. 무려 2만 원 대였다. 설령 평소 와인을 안 마신다고 한들 처음 보는 이웃에게, 심지어 도와드릴까요 묻지도 않고 등을 진 채 엘리베이터 문만 바라보고 있던 이에게 나는 2만 원 대 와인을 기꺼이 건넬 수 있을까. 게다가 비비노 기준 4.1점짜리 와인을.
아직 와인은 뜯지 않았다. 그냥 잔술처럼 홀짝 거릴 때 말고 누군가 함께 마실 일이 생기면 그때 맛을 볼 생각이다. 문제는 이게 고작 지난주 일인데, 너무 당황해서 미처 제대로 보지 못한 아저씨 얼굴이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알아채지 못하리라.
“4월 14일 오후 9시경 8층에 사는 두 모녀에게 주신 와인은 감사히 잘 마셨습니다. “이라고 종이에 써서 엘리베이터 게시판에 붙이기라도 해야 하나. 이보다 좋은 엘레베이터 안 선행이 어디있겠냐며. 최소한의, 일말의 염치는 챙기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묘한 채무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