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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경 Apr 26. 2023

엄마의 부엌, 고기라는 불청객

어차피 먹을 거라면 (4)

오롯이 나 혼자 먹을 음식을 고민하고 만들고 한 끼 배부르게 먹고 나면 그제야 깨닫는 것이 하나 있다.

아, 또 채식했네?


채식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고 채식을 거부하는 것도 아닌데, 혼자 해 먹는 요리에는 거의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다. 한때 환경과 비건에 아주 잠깐 관심을 가졌을 때 거창한 실천보다는 ‘한 끼는 채식하기’를 실천하려 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 결심 때문에 고기를 재료에서 빼기 시작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의 부엌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엄마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스스로 선언하지 않았을 뿐 채식주의자나 다름없다. 물론, 동물 복지를 생각한 행동은 아니다. 그저 젊어서부터 고기 냄새와 식감 때문에 고기를 입에 대지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대충 웬만한 고기는 다 못 먹는다. 대신 고기를 싫어하는 만큼 온갖 나물 반찬을 애정한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 가족이 고기 구경을 얼씬도 못 하는 건 또 아니다. 어마어마한 육식파인 동생 덕분에 식탁 위와 냉장고 안은 적당히 고기가 끊이지 않는다. 다만 고기 맛을 모르는 엄마의 고기반찬에 바리에이션이 부족할 뿐 모두들 채식주의자의 고기 요리에 잘 길들여져 있다.


딸이라 필연적으로 엄마를 닮아서일까. 나이가 조금씩 차면서 엄마가 좋다고 하는 식재료들을 찾아 먹기 시작했다. 아주 가끔은 왜 엄마가 고기를 싫어하는지 알 것 같을 때도 있었다. 고기 없이 속 편하게 배부른 한 끼가 점점 좋아졌다.


그런데, 그럼에도 고기가 당기는 날이 분명 있다. 몸속 버튼이라도 눌린 듯 머릿속에 ‘고기’ 한 단어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럴 땐 또 과감히 먹어준다. 지금이야!

순수하게 고기만 먹고 싶으면 소고기로 카테고리를 선택하고 부위를 좁혀 나간다. 부챗살로 가자.



재료

부챗살 한 덩이, 올리브유, 후추, 방울토마토, 통마늘


만드는 법

우선 집에 부챗살 따위는 없으니 배민 B마트로 적당한 가격(1만 원 대)의 부챗살 한 덩이를 주문한다. 20분 뒤 냉장된 부챗살의 핏기를 키친타월로 제거하고 소금과 후추로 마리네이드 한다. 그사이 달궈진 팬에 올리브유를 자작하게 붓다시피 넣고 부챗살을 올린다. 이제 4분 정도 부챗살을 굽는데, 1분마다 앞뒤로 뒤집어준다. 양쪽을 한 번씩 뒤집었으면 부챗살 옆에 방울토마토를 넣는다. 4분이 되면 ‘이 정도만 굽는다고?’ 싶지만, 망설임 없이 고기를 꺼내 접시 위 기름받이에 올려놓고 포일로 감싸 잔열로 고기를 마저 5분가량 익혀준다. 그 사이 통마늘을 넣고 신나게 튀기듯 익혀준다. 접시 위에 부챗살과 소박한 가니쉬들을 담고 생와사비를 넉넉히 짜준다.

(저마다 좋아하는 익힘 정도가 다르겠지만, 대략 이렇게 하면 미디엄 레어정도로 먹을 수 있다.)



몇십 년 고기 못 먹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생각해 보니 이렇게 스테이크 형태로 고기를 구워 먹은 건 몇 년 만이긴 한듯하다.(실제로 유튜브에서 마이야르 스테이크 굽기가 유행했을 당시 호기심에 먹고 처음인 것 같기도) 이렇게 어쩌다 먹는 거 찹스테이크로 먹을 수는 없으니 남은 한 점까지 포크와 칼로 썰어 먹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이제 남은 건, 기름 지옥이 되어 버린 부엌. 헬스 키친 스테이크를 튀기듯 구우면 정말 맛있지만, 기름이 이렇게 튈 수도 있구나 싶은 광경을 생생히 보게 될 것이다. 마침 외출로 집을 비운 엄마가 돌아오기 전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부엌을 원상복구 해야 했다. 우리 집 부엌은 평소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깔끔했으니. 평온한 뱃속과 달리 부엌은 처참했지만 뜨거운 물로 하나씩 닦아내 보자. 완전 범죄, 왜 안 되겠는가.


한 시간 만에 정리가 끝났다. 1시 반쯤 시작한 요리가 먹고 치우기까지 3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스테미너는 축적되지도 못한 채 모조리 소모된 듯했다. 의자에 늘어져 있으니 그제야 아, 그렇구나 싶었다. 내가 고기를 요리하지 않는 건 엄마의 부엌에 담긴 엄마의 식성을 닮아가서가 아닌 엄마의 부엌 그 자체를 더럽히고 완벽에 가까운 상태로 되돌리기가 힘들어서였음을.


언젠가는 또 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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