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부터 온 이야기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새까만 어둠이었는데, 한참을 떠돌다 보니 동이 트고 있었다. 가로등이 무색하게 밝아진 거리를 보며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토해낸 숨이 하얗게 부서진다. 얼어붙은 공기에 손끝이 붉게 물들었다. 온몸에는 한기가 가득하다. 이제는 감각조차 희미한 손끝을 모아 주먹을 쥐어본다. 잘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이 부서질 것만 같다.
차라리 눈앞에 철문이 따뜻하지 않을까. 입 안이 쓰다. 이른 아침이기에 초인종으로 향하는 손에 망설임이 맺힌다. 문 너머에서 자고 있을 네가 나를 박대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자꾸만 망설여진다.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달칵, 안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열린 문틈으로 막 잠에서 깬 것 같은 부스스한 얼굴이 나온다. 수없이 반복된 상황에 너는 이미 익숙해진 걸까. 동상처럼 굳어 있는 내가 이젠 놀랍지도 않은지 문을 활짝 연다.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온기에 어쩐지 서글퍼졌다. 얼음장처럼 굳어있는 나를 꽉 끌어안는 너 때문에 눈물이 차올랐다.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날 끌어다 침대에 앉히고 도톰한 이불을 뒤집어씌웠다. 그리곤 우유라도 데워 오겠다며 부엌으로 가버렸다. 네가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나는 눈물을 삼켰다. 온몸이 저릿저릿하다.
빨간 머그잔에 담긴 하얀 우유. 적당한 온기가 머그잔을 통해 전해온다. 아니, 온기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머그잔이, 우유가 나의 한기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내 차가운 손이 뜨끈한 우유를 식히고 있는 것 같다. 너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는 것이 느껴졌지만 차마 너와 마주할 자신이 없다.
나는 대체 몇 번이나 너를 찾아온 걸까. 얼마나 찾아왔기에 이것이 너에게는 '일상'이 되어 버린 걸까. 그리고 너는 왜 아무것도 묻지 않을까. 너는 아무것도 모를 텐데, 어째서 아무것도 묻지 않을까. 너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니 바람에 휩쓸려 잔뜩 거칠어진 내 손이 보였다. 하얗게 터버린 손에 쥐어진 빨간색 매끈한 머그컵도 보였다.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파들파들 떨고 있다는 것을.
위태롭게 쥐어진 머그컵을 하얗고 작은 손이 조심스레 가져간다. 너의 손은, 참 따뜻하다. 네가 데운 우유가 담긴 머그컵보다도 더 따스하게 느껴진다. 눈물이 날 만큼 따스하다. 네가 없다면 나는 아직도 거리를 배회하고 있겠지. 집에 돌아갈 생각 따위는 없는 나는 아마 쓰러질 때까지 배회하고 있겠지.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눈물을 억눌렀다. 여기서 울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꾹꾹 눌렀다. 이미 고인 눈물은 손등으로 훔치고 아무렇지 않은 척 가만히 있었다.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일까. 네가 다가와 나를 안았다. 정확히 네가 무어라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 따스한 온기에 취해, 그 따뜻함에 긴장이 풀려 애써 참은 눈물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