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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희 Sep 20. 2020

방망이 깎던 노인

느리게 다듬는 관계


 윤오영 수필가의 ‘방망이 깎던 노인’이라는 작품을 아는가? 필자가 길가에서 방망이 깎는 노인을 보고 사라져 가는 장인정신과 전통에 관해 쓴 수필이다. 나는 이 작품을 교복을 입던 시절 국어 시간에 처음 접했다. 선생님께서는 작품에 담긴 의미를 열심히 설명하셨지만, 당시 나는 ‘장인정신’과 ‘느림의 미학’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는 아이였기 때문에 이 작품에 크게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교실에 앉아서 수업을 듣던 아이들 대부분이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요즘은 길거리에서 온 신경을 집중해 방망이를 깎는 노인의 모습을 자주 상상한다. 이 상상은 내가 직접 연필을 깎으면서 시작됐다.     


 연필을 깎아 쓰게 된 것은 몇 년간 만들어진 독서 습관 때문이다. 바로 ‘책에 밑줄을 그을 때 연필이나 연필 두께의 샤프 외에 볼펜과 형광펜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사실, 단순 습관이라기보다는 철칙에 가까울 정도로 집착하는 편이다. 이 철칙에는 나름에 이유가 있다. 일단 볼펜과 형광펜은 지울 때 자국이 남는다는 게 꺼려지는 가장 큰 이유다. 이들을 지워야 할 때는 수정테이프를 써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그 하얀 흔적이 책에 남는 것을 볼 수 없다. 나에게 책에 수정테이프를 바르는 일은 멋진 그림 위에 실수로 잉크를 엎는 것과 같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연필은 손으로 깎아야 한다.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으면 편리하기는 하겠으나 심이 너무 뾰족하다. 나는 선을 곧게 긋지 못해서 뾰족한 연필로 밑줄을 그으면 꼭 구불구불해지는데 이것이 맘에 안 드는 것이다. 반면 손으로 직접 깎은 연필은 그런대로 뭉툭해서 훨씬 부드럽게 그어지기도 하고 조금 삐뚤게 그어지더라도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라 연필깎이보다는 손으로 깎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면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다가 중간에 빼면 되지 않나?’라는 물음이 생길 수 있겠다(사실 스스로에 했었다). 그런데 그것은 되다 만 것 같은 인상이라 또 싫은 거다. 이렇게 보니 독서 습관이 문제가 아니라 단지 내 성정이 까다롭고 고약한 탓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나는 연필을 손으로 깎는다.


 먼저 엄지를 뺀 왼손의 네 손가락으로 연필을 단단히 쥔다. 오른손은 커터칼을 적당히 빼내어 연필에 갖다 댄다. 그리고 왼손 엄지로 커터칼의 칼등을 힘 있고 부드럽게 민다. 연필을 깎는 과정이다. 이때 가장 어려운 것이 칼을 힘 있고 부드럽게 밀어내는 일이다. 연필을 이루고 있는 나무의 상태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대게 칼날과 연필이 맞닿은 각도에 따라 뭉텅뭉텅 썰려 나가기도 하고 매끄럽게 깎이기도 한다. 나는 잘 깎이는 미세한 각도를 찾으려고 온 신경을 연필과 칼에 집중한다. 바로 이 순간 그 노인을 떠올리며 나도 한 명의 장인, ‘연필 깎는 노인’이 되어 정성 들여 한 자루의 연필을 깎는다.

 물론 나는 진짜 장인은 아니라 결과물은 매번 다른 모양이다. 하지만 그 엉성한 모습에 애정이 간다. 쉽게 깎여진 연필이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다듬은 하나의 연필은 비록 모습은 못났을지라도 연필을 깎던 수분의 시간과 손의 온기가 다듬어진 면면에 새겨져 있다. 이것이 연필을 더 쥐고 싶게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길가의 노인은 필자가 생각하던 것과 달리 그 방망이를 쓸 사람을 위하는 마음, 즉 정성을 추구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은 관계를 이루는 것과도 맞닿아 있다. 연필깎이처럼 편리하고 쉽게 깎여 만들어진 관계에서 서로를 향한 애정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애정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고 조건을 따지는 차가움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언제든 그 뾰족함에 찔려 상처 입을 수 있다. 하지만 나와 상대가 서로를 생각하고 위하며 오래 정성 들여 관계를 다듬어 간다면, 서툰 솜씨더라도 애정이 묻어나고 더 손이 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상적인 관계가 아닐까?


 요즘 많은 사람이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아준다는 여러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한다. 나와 비슷한 조건의 사람과 빠르게 관계 을 수 있다는 것을 이유로. 물론 이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여러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는   없다. 그러나 단편적으로밖에   없는 정보 속에서 사람을 판단하여 이어가는 관계가 내가 애정을 쏟을  있는 진정한 관계 맺음인지는 의문이 든다.

 빠름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는 조금 느려도 괜찮지 않냐는 것이  생각이다. 서로가 정성을 담아 다듬어 놓은 관계를 보고 이건  이렇게 못생겼냐 하면서도 이것도 나름대로 좋은 모양이라고 따뜻한 웃음을 나누는 관계가 많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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