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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희 Oct 02. 2020

보물보다 좋았던 민들레

각자의 보물은 다 다르니까.


 길가에 민들레 홀씨를 볼 때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오래도록 새겨진 기억은 다름 아닌 유치원 소풍이다. 이 기억은 숫자 1 다음에는 2가 오는 것처럼 민들레를 보면 자연스레 이어져 떠오른다. 그만큼 내게 강렬한 기억이라는 것이겠지. 소풍에서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날은 굉장히 맑았고 보물찾기를 했다는 것, 부모님이 동반하는 소풍이었다는 것뿐이다. 어디로 갔는지, 그날 뭘 먹었는지, 내가 뭘 입고 있었는지 그런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보물찾기 시간만큼은 그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내 뒤를 따라온다. 그리고 하얗고 보송보송해 보이는 민들레 홀씨를 보면 냉큼 뛰어와 내 옆에 선다. 참 질기게도 나를 따라온다.




 보물찾기 시간에는 부모님과 아이들이 따로따로 다니며 A4용지를 작고 네모나게 오린 쪽지를 보물이라고 부르며 찾으러 다녔다. 아마 아이들보다 부모님들이 그 ‘보물’을 찾으려고 열을 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부모님이 자신의 아이가 보물 하나를 못 찾고 꼴등 하는 모습을 보고 싶겠는가.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내 엄마는 ‘아이가 보물 하나를 못 찾고 꼴등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엄마’였고 어린 나는 보물이라고 쓰인 하얀 쪽지보다 더 크고 눈에 잘 띄는 하얀 민들레 홀씨를 더 좋아했다. 그러니까 그 보물찾기 시간 내내 엄마는 보물을 나는 민들레 홀씨를 찾아다녔다.

 나는 땅에 둥그렇고 하얀 게 보이면 달려가 꺾었다. 물론 지금은 민들레 홀씨를 봐도 불거나 꺾지 않고 지켜보기만 한다. 하지만 당시 나는 애석하게도 ‘식물을 함부로 꺾으면 안 된다’라는 개념은 없었다. 어쨌든 나는 민들레 홀씨를 손에 들고 후, 후 불며 보물을 찾는 아이들 사이를 다녔다. 그러다 엄마를 만나면 민들레를 찾았다며 자랑했는데 엄마는 내 손에 들린 민들레에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보물도 찾으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민들레 홀씨를 찾는 일에 몰두해 있는 상황이라 엄마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찾았다!”, “어디?”

 푸른 덤불 아래 움푹하게 파인 곳에 민들레는 언제든 씨앗을 바람에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손에 들고 뒤를 돌았다. 엄마는 나의 외침에 나를 보고 있었고 시선은 곧 내 얼굴에서 손으로 손에 쥐어진 민들레 홀씨로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내 얼굴로. 그때 내가 본 엄마의 얼굴은 나를 약간 울렁거리게 했다. 내가 느끼던 공기가 순식간에 바뀐 탓이겠다. 분명 날은 맑았고 바람도 부드러웠는데 나는 물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가 나를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짜증이 났을까, 화가 났을까, 어쩌면 보물찾기에는 집중 못 하고 풀이나 뜯으러 다니는 딸이 한심했을 수도 있겠다.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유치원에서 숨겨놓은 보물을 찾으라고 준 시간이니 당연히 보물을 찾는데 시간을 쓰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때 내게 보물은 종잇조각이 아니라 민들레 홀씨였는데 엄마는 그걸 조금은 알고 있었을까.


 언젠가 이때의 내 기억을 엄마에게 들려줬더니 엄마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웃은 것은 그날의 나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가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딱히 화가 난다거나 억울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런 감정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기억을 곱씹으며 날아갔다. 다만 그날 민들레 홀씨를 다시 원래 자리에 버리듯이 놓아두었던 어린 나의 모습은 참 슬프게 보인다. 민들레 홀씨를 두고 돌아선 순간부터 기억은 온통 먹빛이다. 보물찾기가 끝나고 열심히 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선생님들은 두 줄로 길게 아이들을 세웠다. 그리고 “보물을 하나도 찾지 못한 친구들이 있으면 옆에 친구가 하나씩 나눠 주세요.”라는 말도 덧붙였다. 애초에 꼴등 같은 건 없는 보물찾기였다. 지금에서야 종잇조각을 찾는 게 아니라 새파란 나뭇잎, 매끈한 돌멩이, 민들레 홀씨같이 자신이 보물로 생각할 수 있을 만한 것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었으면 더 좋았을 걸 하고 덧없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때부터 나는 내 행동과 감정에 스스로 제약을 두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푹 빠지는 아이가 비단 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배우이자 작가인 구로야나기 테츠코는 불과 초등학교 1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이유는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창가에 서서 친동야(독특한 옷차림에 악기를 매고 다니며 선전이나 광고를 하는 사람)에게 연주를 부탁한다든지, 제비가 집 짓는 것을 보고 제비에게 무얼 하는 거냐고 말을 건다는 것이었다. 테츠코는 이렇게 수업을 방해해 다른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다. 하지만 이후 아이들의 다름을 존중해주는 고바야시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이전과는 다른 정말 즐거운 학교생활을 한다. 고바야시 선생님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허투루 듣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정화조(당시 화장실은 수세식이 아니었다.) 아래로 떨어진 지갑을 찾기 위해 분뇨를 퍼내며 밖에 쌓아두는 것을 보아도 화를 내기는커녕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물어보고는 “끝나고 나면 전부 원래대로 해놓거라.”하고 지나가신다. 작가는 이후 이 일을 ‘창가의 토토’라는 소설로 묶었다. 나는 이 소설을 초등학생 때 읽고 아직도 책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 토토가 나와 매우 닮았다는 생각, 나도 고바야시 선생님을 만났으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일을 얼른 찾을 수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에 책을 버리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먹으며 자란다. ‘하지 마’, ‘안 돼’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면 그 목소리가 속에 쌓여 아무것도 쉽게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그런 걸 왜 하니?’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면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게 되는 마음이 부러진다. 마음이 군데군데 부러지고 무기력해지면 결국 바깥 목소리에 휘둘려 A4용지 같은 다 똑같은 옷을 걸치게 되는 것이다. ‘보물’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어도 진짜 자신의 보물이 뭔지도 모른 채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자신의 보물이,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삶은 얼마나 먹빛으로 가득한가. 그러니 우리는 서로에게 고바야시 선생님이 돼야 한다. 개성을 살리는 것과 동시에 개성을 죽이기를 바라는 세상에서 서로의 보물을 찾아주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겠지만, 서로가 하는 일을 응원해주자. 너의 말과 행동이 쓸모없는 짓이 아님을 알고, 네가 하는 것에 의미가 있음을 안다고 말해주자. 그러면 A4용지 따위는 다 찢어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보물 하나만 품에 꼭 안고 갈 수 있겠다. 언제든 자랑스럽게 품에 든 것을 보여주며 내가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커버 이미지 출처: Photo by Felipe Giacomett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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