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찾아와 묵직하게 생각거리를 던진 영화
요즘 극장가는 참 조용하다. 코로나 감염 우려로 관객의 발길은 오래전에 끊겼고 그에 따라 개봉하는 영화 수도 적어졌다. 하지만 조용한 것은 관객들의 발걸음뿐만 아니다. 영화에 대한 기대감 또한 조용해졌다. 예고편만 봐도 무슨 내용일지 대충 예상이 가는 영화들이 개봉하는 탓에 감염 위험을 뚫고 ‘굳이’ 영화관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러던 와중 눈길을 끈 영화 하나가 있었다. 배우 유아인, 유재명, 문승아 주연의 ‘소리도 없이’이다.
영화는 ‘유아인 배우가 이 영화를 위해 살을 찌웠다.’. ‘출연료도 거의 포기하면서도 촬영에 임했다.’라며 홍보했다. 처음에는 이런 홍보문구에 혹하지 않았다. 배우가 작품을 위해 체중을 증량하거나 감량하는 일은 흔하다고 생각했고 출연료 이야기도 내게 흥미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나보다 먼저 영화를 본 내 친구 때문이었다. 내 친구는 많은 생각을 하고 싶으면 보고, 재미를 추구한다면 별로라고 했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내용을 해석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 친구 말에 미루어보자면 ‘소리도 없이’는 내게 적격인 영화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딱 들어맞았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몇몇 장면에서 ‘설마, 이렇게 되나?’하고 예상을 했지만, 이 영화는 내게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알려줬다. ‘생각할 틈 따위 주지 않겠다!’ 하며 긴박하게 흐르는 여타 범죄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는 영화 제목처럼 고요한 분위기 속에 관객을 밀어 넣고는 소리도 없이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좋은 게 좋은 거지, 근데 나쁜 건 그냥 나쁜 거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범죄를 저지르는 두 인물 혹은 범죄에 관련된 모든 인물에게 일말의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영화를 끝까지 보면 ‘결국 범죄자는 범죄자일 뿐이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크고 작은 사건을 접하며 기성 언론이 범죄자를 어떤 태도로 다루는지 너무도 잘 봐왔다. 그런 점에서 ‘소리도 없이’는 범죄자에 대한 의미 부여는 모두 쓸모없음을 보여준다.
보통 영화를 보면 여러 방법을 통해 등장인물의 배경을 설명한다. 관객에게 등장인물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이해를 시키기 위해서다. 특히 범죄 영화에서는 악으로 그려지는 인물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쩌다 악인이 되었는지에 대해 필수적으로 설명한다. 심지어 사이코패스일지라도 이 범죄자가 얼마나 머리가 좋고 악랄한지 보여주려 한다. 그런데 ‘소리도 없이’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 태인(유아인)과 창복(유재명)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부업은 범죄조직 시체 처리지만 본업은 흔히 볼 수 있는 달걀 장수라는 것, 두 사람 모두 신체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전부다. 이들이 어쩌다 시체 처리를 맡게 되었는지, 둘은 어떻게 만났는지 두 인물에 과거는 크게 조명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들이 우리가 보통 상상하는 범죄자보다 뭔가 어설프고 간혹 웃기거나 착하게 보일지라도 결국 살인 방관에 시체유기 거기다 유괴까지 하게 된 범죄자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또 초희(문승아)의 행동을 통해서도 이들이 범죄자임을 끊임없이 관객에게 인식시킨다. 초희는 태인의 집에서 머물게 되면서 태인과 점점 친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장면이 보인다 싶으면 초희는 태인에게서 도망칠 기회를 엿본다. 극 중 이런 장면이 몇 번 반복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앞선 장면들에서 느껴지던 두 사람의 유대감에 둘을 남매나 친구처럼 인식하다가도 이런 생각을 하던 스스로에 깜짝 놀라며 ‘유괴범-유괴당한 아이’로 시선을 고치게 됐다.
태인과 창복의 결말 또한 이 두 사람이 범죄자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창복은 태인에게 기도 테이프를 열심히 들으면 말을 하게 될 것이라고 훈계하는 등 신실한 신자로 나오는데 그의 끝은 그의 신신함과는 별개로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는 초희의 몸값이 든 돈 가방을 챙기러 갔다가 죄책감과 불안감이 극에 달해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죽음을 맞이한다. 허무하게 죽은 그의 뒤로 창문에 새겨진 ‘편안히 하늘로’라는 글씨가 보이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신앙이 어느 정도든 범죄자의 최후는 이렇게 초라하고 허무하기 짝에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태인은 초희에게 버림받음으로써 끝이 난다. 초희는 태인과 함께 자신이 다니던 학교에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 만난 담임선생님에게 태인을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아닌 ‘유괴범’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초희가 태인을 버림으로써 태인은 초희가 무사할 수 있었던 조력자가 아닌 유괴범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검은 정장
영화에서 태인은 제대로 된 보호자, 어른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태인은 극 초반 등장하는 ‘실장’이라는 인물을 부러워하는 듯 보인다. 자신과 함께 다니는 창복은 창복보다 어린 실장에게 언제나 굽신거리지만, 실장은 조직의 높은 위치에서 부하들을 거느리며 여유로운 모습이다. 태인이 접할 수 있는 사람 중 ‘멋져 보이는’ 어른인 것이다. 그래서 태인은 조직의 부하들이 벗어놓은 검은색 정장을 자신에게 대보기도 하고 못 피우는 담배를 입에 무는 등 실장을 흉내 낸다. 결국에는 실장이 조직에 죽었을 때, 눈독 들이던 실장의 검은 정장을 챙긴다.
이 검은 정장은 위기의 순간에 다시 등장한다. 초희가 인신 매매업자에게 넘겨졌을 때 태인은 초희를 구하러 가기 위해 검은 정장을 입는다. 나는 이 부분에서 영화 ‘아저씨’가 잠깐 떠올랐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아는 ‘아저씨’의 명장면 말이다. 주인공인 태식(원빈)이 소미(김새론)를 데려간 이들의 본거지를 덮치기 전 그는 덥수룩한 머리를 밀고 검은색 정장을 꺼내 입는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은 태식은 그냥 옆집 아저씨가 아니라 스스로 소미의 보호자가 되고자 함을 극적으로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장면이 태인이 초희를 구하러 가기 위해 정장을 입는 장면과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 태인은 초희를 스스로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초희의 보호자가 되어 그녀를 구하러 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정장은 버려진다. 초희는 자신을 학교로 데려다준 태인을 유괴범이라 알리고 태인은 도망간다. 그는 도망가며 자신이 입고 있던 정장 재킷을 길에 버린다. 태인은 결국 제대로 된 보호자일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가 초희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인신매매 위험에서 구해내고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한들 그가 초희를 유괴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유괴범이 어떻게 유괴한 아이의 보호자가 될 수 있겠는가? 초희에게 태인은 계속 가족도 친구도 아닌 유괴범일 뿐이었다.
#문주는 착하지?
초희라는 인물은 한 마디로 영악하다. 보통 영악하다는 말은 부정적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부정적으로 쓰지 않으려 한다. 초희는 생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래 학습한 사람 같다. 어떻게 해야 자신이 사랑받고 보호받을 수 있는지를 11살이라는 나이에 이미 알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초희가 자란 환경 때문으로 보인다. 초희의 아버지는 초희보다 남동생을 더 아끼는 것으로 나온다. 납치범들은 초희의 몸값을 요구하는데 초희 아버지는 딸을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몸값을 깎기 위해 납치범들과 흥정을 한다. 이를 듣게 된 창복이 ‘자식이면 다 귀하지 왜 차별을 하느냐’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런 직접적인 언급 외에 초희의 행동을 봐도 알 수 있다. 태인의 집에서 초희는 자신보다 어린 태인의 친동생 문주(이가은)에게 옷을 개는 법, 손빨래하는 법, 식사 예절을 알려준다. 별생각 없이 본다면 예의 바르고 기특한 아이 정도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초희가 살아남기 위해 터득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옷을 개고, 손빨래하고, 자신보다 어린아이에게 어른에 대한 예절을 가르치는 것이 과연 열한 살 난 아이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초희는 분명 자신의 집에서도 평소 이런 행동을 했을 것이다. 자신보다 동생을 더 좋아하는 아버지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부모가 어린 자식에게 당연하듯 주는 사랑을 초희는 얻어내야 했을 것이다. 이런 삶 속에서 초희는 눈치를 키우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 초희는 어떻게 해야 자신이 태인에게 애정을 받을 수 있는지도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렇게 행동했으며 결국 태인의 마음을 여는 데 성공한다.
초희는 문주에게 끊임없이 “문주는 착한 아이지?”라며 문주를 타이른다. 나는 이 말이 슬프게 들렸다. 왠지 초희도 자신의 집에서 저 말을 수없이 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과 남동생을 둔 나와 초희가 어느 정도 닮았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나도 남아 선호 사상이 짙은 집에서 태어나 ‘네가 누나니까 양보해야지’ 따위의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착한 아이지?’나 ‘누나니까’ 같은 말은 아이를 일찍 어른으로 만든다. 이런 말을 듣는 아이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야 부모님이 혹은 다른 어른들이 자신에게 애정을 주는지 일찍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보단 어른들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된다. 영화 속 초희라는 인물을 들여다보면 현실에서 다양하게 차별받는 아이들이 살아남으려 하는 발버둥이 보인다.
범죄자의 이야기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 범죄자보다 피해자의 시선으로 봐야 한다는 것, 차별받으며 자란 아이는 자신도 애정을 느끼고 싶어서 결국 자신을 차별한 어른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는 것. ‘소리도 없이’는 영화 속에서 이런 메시지를 제목처럼 소리 없이 관객의 시선에 심어놓는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기존 범죄 영화 장르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도를 해 좋은 결과물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오락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잔잔한 템포로 우리가 정말 봐야 할 것들을 명확하게 알려주었다. 모든 영화가 의미와 교훈을 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영화가 오락과 어설픈 교훈을 주는 것에 치중해버린다면 그것 또한 옳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간간이 ‘소리도 없이’와 같이 잔잔하지만, 현실을 찔러주는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