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년 회고록

by roomglass

2023년 5월 5일 오후, 온화하고 맑아야 할 어린이날. 집안 공기가 차갑고 딱딱하다. 전날부터 내리던 비로 음침해진 날씨 탓인가. 아니다. 나는 답을 알고 있다. 며칠 전 거셌던 모녀간 말다툼으로 인한 냉기 때문인 것을. 끼-익. 조심스레 열리는 내 방문 소리에 그 정적이 깨진다.


“어린이날, 축하해.”


엄마가 외출 준비를 하고 있던 나에게 다가와 선물이 든 쇼핑백을 내 옆에 두고는 가만히 나를 쳐다본다.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회피한 채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반항도, 심술도 아니었다. 냉랭했던 마음에 훅 들어온 온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운, 그런 마음이었다.


그렇다. 난 효년이다.

효년은 요즘 인터넷에서 쓰이는 말인데, 불효심으로 벌인 일은 아니나 의도와는 달리 방법이나 방향성이 조금 잘못된 상황에 쓰인다. 효녀와 불효녀의 경계를 자유롭게 뜀박질하는 나에게 정말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효녀’라 부르기엔 억울한, ‘불효녀’라 부르기엔 과한 사람에게 사용되는 그런 말.


아무쪼록, 난 효년이다.

나에 대한 엄마의 온기를 알면서도 모른 척 냉기부터 뿜어내는 효년.

언제부턴가 그 온기가 당연해져 소중함을 잊고 사는 효년.

어떻게든 불효녀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싶진 않다.


며칠 전 유튜브로 우연히 시트콤 순풍산부인과를 보았다. 말괄량이 소녀이자 국민 딸내미 미달이가 그의 친구 의찬이가 받은 졸업 선물을 보고 놀란다. 선물은 생일과 크리스마스 때만 받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안 미달이는 가족들에게 달려가 졸업 선물을 달라며 떼를 쓴다. 나는 몰랐다. 선물을 받는 날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나는 엄마에게 꽤 많은 선물을 받아왔다. 입학과 졸업, 그리고 생일을 제외하고도 성적이 오른 날, 키가 쑤-욱 큰 날, 초경을 한 날, 엄마와 나들이를 간 날 짧은 카드 혹은 긴 편지와 함께 정성스레 포장된 선물을 받았다. 선물을 받을 구실이나 명목은 만들면 그만이었다. 스물여섯이 된 지금까지도 엄마의 영원한 어린이라는 이유로 어린이날 선물을 받고 있고, 크리스마스 날 아침 트리 아래에는 산타(이고 싶은 엄마)의 선물과 삐뚤빼뚤한 글씨의 카드가 놓여 있다(글씨가 삐뚤빼뚤한 이유는 산타는 외국인이고, 한국어를 잘 모른다는 설정인 듯하다). 사실 왜 이렇게까지 엄마가 나에게 선물을 주는지 아니, 왜 그렇게 이벤트에 진심인 줄 모르겠다. 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어린이날 선물을 주냐는 말에 엄마는 피식 웃으며, ‘철딱서니 없는 네가 어린이지, 어른이냐?’고 답한다. 맨날 속만 썩이는 딸에 대한은근한 일침 같이 느껴지면서도 늘 딸을 사랑하고 아끼는 엄마의 마음이 와닿는다.


엄마는 나의 모든 순간순간을 사랑한다. 점점 흐려지는 나의 흔적들을 꼭 쥐고 있으려는 그의 의지가 집 안 곳곳에 묻어있다. 가스레인지 위엔 일곱 살 유리가 만든 도자기 피규어들이 줄지어 있고, 화장대 거울 앞엔 대학생 유리와 찍은 사진이 기대어 있고, 옷장 안쪽 서랍엔 어린 유리가 엄마에게 쓴 편지와 그린 그림들이 차곡히 누워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집안 구석구석, 그의 온몸 구석구석 정갈하게 담겨있다. 그렇게 나에 대한 모든 기억을 담고 있는 엄마는 어린 날의 내가 그립다고 말한다. 나는 기억에 없는데, 초등학생 때 스승의 날 학교에 꽃을 들고 온 반 친구 엄마에게 “아줌마, 프러포즈받으셨어요?”라며 활짝 웃었다고 한다. 내가 현실에 젖어 차가워질 때마다, 사회에 물들어 딱딱해질 때마다 엄마는 어린 유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때의 모습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세상을 좀 더 둥글고 따뜻하게 바라보기를 소망하면서, 말과 행동에 사랑스러움과 포근함이 묻어있던 어린 유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스물여섯, 올해도 어김없이 받았던 어린이날 선물 쇼핑백 안에는 고양이 인형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일을 마치고 백화점 앞을 지나던 엄마는 문득 세 살 적 내가 떠올라 홀린 듯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십여 년 전 세 살의 너와 백화점 아이쇼핑을 하던 것이 생각났어.

그때 그 어린아이에게 밤에 꼭 끌어안을 인형을 사주고 싶더라.”


담담히 이야기하는 엄마의 진심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절한 온기가 내 마음을 살살 녹였다. 속도 모르고 지나치게 꽝꽝 얼어붙어있던 마음이 민망스러워, 엄마를 내 품에 쏙 끌어안았다. 언제부터 엄마 품에 내가 담기지 않았던지, 이젠 내 품에 쏙 담기는 그런 엄마를 포근하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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