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마라톤이라고 한다. 길게 놓인 코스를 달리며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결승점을 향하기 때문일까. 어른들은 항상, 인생은 급할 것 없이 나만의 속도를 찾아 꾸준히 길게 달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와 달리, 내 인생은 늘 100m 달리기의 연속이었다. 아직 사는 것에 서투른 탓인지, 요령 없이 매번 온몸의 근육을 바짝 세워 전력을 다했다.
나의 모든 일은 운동화 끈을 묶는 것부터 시작한다. 행여나 끈이 풀리지는 않을까 양손에 힘을 주어 끈을 꽈-악 조여 매며 달리기를 준비한다. 먼저, 앞으로 나아갈 다리를 뒤에 놓고 무릎을 구부린다. 엉덩이를 바짝 올리는 것까지 마치면 매서운 눈길은 결승점을 향하고, 뇌와 귀를 지나 손끝의 털까지 단단히 세우며 출발 소리에 집중한다. 땅! 하는 총성에 몸통을 기울이고, 팔을 흔들어 공기를 가르며 빠르게 달린다. 빳빳했던 근육들을 뜨겁게 달구면서 말이다. 마지막 피니쉬 라인에 발이 닿는 순간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피니쉬라인에서 몇 미터 더 앞으로 나가서야 날카로웠던 눈길은 전광판을 향한다. 가쁜 숨을 달래 가며 기록을 살피고, 달렸던 내 모습을 모니터링하며 경기 하나를 마친다.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피 맛은 내가 얼마나 전력을 다했는지 느끼게 한다.
찬 공기에 봄 햇살이 사알짝 스며들 때쯤,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한바탕 달렸던 탓에 몸과 마음에 재충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복학이라는 다음 경기에 참여하려면 뜨겁게 달궈진 근육을 식히고, 거칠어진 신경을 부드럽게 사포질해야 했다. 언제나 그랬듯 동행은 없었다. 읽을 책 몇 권과 메모할 노트 하나를 가방에 넣고, 생각이 많아질 때마다, 발길이 멈출 때마다 펼쳐 읽고 쓰며 나를 쓰다듬고 다독였다.
프랑스 첫 여행지, 낭만의 도시 파리의 봄은 꽤 겁이 많아 보였다. 겨울의 묵직함에 눌려 봄 햇살은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축축함에 서려 가느다랗게 내리는 비와 옷깃을 파고드는 날 선 바람을 느끼며 도대체 어디서 사랑이 꽃피는 건지 의아했다. 하지만 이내 날씨에 젖어 사연 많은 예술가가 되기도, 자유로운 방랑자가 되기도 하며 축축한 듯, 촉촉한 파리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발길이 닿는 대로 걸으며, 축 늘어졌던 마음을 조금씩 추슬렀다.
어느 정도 몸과 마음에 생기가 돌자, 멀리 두었던 외로움이 은은하게 몰려왔고, 머릿속엔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채워졌다. 그때, 프랑스에 가면 꼭 니스를 가보라던 상사(휴학 중 짧게 어시스턴트 업무를 했었다)의 말이 떠올랐고, 마침 세계적인 니스 카니발이 열린다는 정보를 듣게 되었다. 카니발 소식을 듣자마자 그날의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민박집 2층 침대에 앉아 남은 돈과 아직 이루지 못한 파리 일정들이 적힌 메모들을 쭉 펼쳐 놓았다. 니스로 갈 교통수단과 경비, 귀국 전까지의 시간을 계산하고는 곧바로 니스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다이어리 한편에 <파리에 다시 와야 할 이유>를 쓱쓱 적으면서 말이다(그 아래에는 미뤄둔 파리 여행 일정을 나열해 놓았다).
저가 항공을 예약한 탓에 짐을 최소화해야 했기에, 가지고 있던 옷 몇 벌을 쓰레기통에 욱여넣으며 짐을 줄였고, 조금은 가벼워진 몸으로 나는 니스로 향했다. 공항에 내려 전차를 타고, 니스 중심지로 이동하는 내내 창밖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비행기에서 조는 사이, 누군가 눈에 필터를 갈아 끼웠던 건인지, 파리와는 다른 다정하고 부드러운, 청량한 니스의 분위기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전차에서 내리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숙소까지 가던 길은 마치 HB 연필로 스케치하고 얇은 색연필로 채색한 그림 같았다. 한 폭의 그림을 따라 걸으며 도착한 에어비앤비 숙소, 그곳에서 호스트 실바인을 만난다.
엄마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던 중년 남성 실바인은 폭신하고 따뜻한 미소가 매력적이었다. 맑고 투명한 옥빛의 눈동자로 눈을 맞추며 주변 공기까지 달달하게 만들어 주던 그는 함께 지낼 게스트들을 소개하며, 숙소 이용법을 설명해 주었다. 그 사이 창문 밖은 점점 어둠으로 채워졌고, 각자의 저녁을 챙겨 식탁에 마주 앉았다. 실바인의 친절함과 따뜻함은 나를 그 시간과 장소에 서서히 스며들게 했다. 마트에서 사 온 소박한 저녁 메뉴와는 달리, 우리는 소소한 이야기로 풍성하게 식탁을 채워갔다. 남자친구와 떠날 그의 태국 여행 계획을 들으며 함께 설레기도 하고, 서로의 가족과 살아온 환경을 이야기하며 든든한 상담가가 되기도 하며, 니스에서의 첫 저녁 식사를 마쳤다.
며칠 뒤 저녁, 룸메이트 니콜라가 하루 종일 해변에서 논 것에 신이 났나 보다. 휘파람을 불며 샤워 준비를 하더니 수영복을 빼꼼 내려 뽀얀 엉덩이를 자랑한다(숙소는 혼숙이었고, 다행히 그는 수영복 앞쪽은 내리지 않았다). 그의 장난에 깔깔거리던 우리는 하루 동안 보낸 각자의 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혼자 산책하며 아저씨들의 노상 방뇨 현장을 보고 당황한 나의 하루, 일자리 인터뷰를 하면서 쇼핑 중인 나를 발견했던 니콜라의 하루. 서로의 이야기에 취해 어느새 밤이 된 하늘을 보며, 침대 머리맡에 달린 스탠드를 켰다. 그날 하루로 시작했던 이야기는 곧 각자가 니스에 오기까지의 여정으로,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로 이어졌고, 어둠 속 스탠드의 은은한 주황빛이 밝아질수록 우리의 대화는 더욱 짙어졌다. 그렇게 니스의 밤과 새벽은 느릿느릿 천천히 흘렀다.
어느 정도 혼자만의 시간도 보냈겠다, 고대하던 니스 카니발은 여러 사람과 함께 즐기면 좋겠다는 생각에 하루는 인터넷 여행 카페에서 동행자를 찾아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아마도 네이버 ‘유랑’이라는 카페였던 것 같다). 서른 살의 작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휴학 후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쓴다고 했다. 서로를 소개하며 니스 해변의 빵 가게에서 얼굴만 한 샌드위치를 사고, 그 옆 슈퍼에서 와인을 한 병씩 골랐다. 한 병을 다 마실 계획은 없었지만, 잔잔하게 흘러가는 대화 내용과, 평온하게 첨벙이는 얕은 파도, 나지막하게 들리는 주변 소리는 술을 더 달고 진하게 만들었다. 온화한 바닷물의 비릿한 향이 코끝에 맴도는 듯, 형용할 수 없는 몽롱한 단맛은 절대 잊을 수없을 것이다(나는 그 맛을 ‘푸른 니스 맛’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매일 전력 질주하던 나와는 다르게 천천히 자신의 길을 밟고 있는 그를 보면서 찬찬히 나를 돌아보았다. 따가운 햇볕에 종아리가 벌게지는 것도 모른 채 그 순간에 푹 빠져들면서. 햇볕이 어찌나 따갑던 지 머리끝까지 취기가 오른 우리는 각자 휴식 후 다시 만나기를 약속했다.
취기를 달랜 후 니스 광장에서 다시 만난 우리는 그 누구보다 신나게 니스 카니발을 즐겼다. 캐릭터 분장을 하고 거대한 카트 위에서 춤추던 사람들에게 휘슬을 불고, 낯선 이들과 알록달록한 종이 가루를 뿌리고 함께 사진을 찍으며 깔깔댔다. 그날만큼은 모두가 하나였다. 형형색색의 불꽃과 함성으로 가득 메꿔진 밤하늘 아래서. 그리고 문득, 파리에서 니스까지의 모든 여정이 밤하늘 속 흩뿌려지는 불꽃들에 오버랩되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면서 왠지 모를 가벼움과 후련함이 여러 생각들로 나를 간지럽혔다. 어쩌면 나는 100m가 아닌, 42.195km를 달리고 있던 것일지 모르겠다. 100m를 달리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은 탓에 남은 거리를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마라톤 코스 속 급수대에 머물며 더 오래 달릴 수 있도록, 내 속도를 잃지 않도록 나만의 페이스를 지키고 있던 건 아닐까. 100m 달리기 후 재충전을 위해 떠난 프랑스 파리와 니스 여행이 어쩌면 마라톤 코스 속 한 구간을 달리던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느리지만, 천천히 꾸준히 달리면서 말이다.
인생은 100m인지, 42.195km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성실히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