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발버둥 치며 알려달라고 애원해도 알려줄 수 없는 것이 있다.
알려주는 입장에서는 구구절절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거나 너무나도 많은 경우의 수와 입장의 차이, 그리고 결국 자신이 직접 그 시간에, 위치에, 역할에 도달해보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 되는 것들이 우리의 삶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고정되어 있는 듯하지만 유동적이고 그렇게 흘러 사라져 버릴 것 같으면서도 또 누군가가 알아서 그 역할을 해주는 덕분에 우리는 정이라는 것, 풍습이라는 것, 또는 관습이라는 것 그리고 이런 것들을 통틀어 문화라는 보이지 않는 원칙에 기대어 인류라는 종의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 1 애정의 불문율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감정의 격렬한 격랑의 시기가 있다. 생애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상실감에 몸서리치고,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두려움에 두 눈을 질끈 감아도 사라지지 않는 추억의 잔상이 밤을 괴롭히며, 무엇보다 그 어떤 누구로도 대체되지 않는 공허함에 세상이 끝날 것 같은 고통의 시기를 지나며 문득 깨닫게 되는 그것.
‘정말.. 사랑이었구나.’
일상의 반복에 익숙해지고, 가까이 있음에 덜 소중하게 대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던 그 사람이 어느 날, 새벽안개처럼 사라지고 나면 깨닫게 되는,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귀는 동안에는 알 수 없는 귀중한 것, 바로 사랑이다.
# 2 부모님: 아낌없이 주는 유일한 사람들
연인 간의 사랑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와 폭포수 같이 쏟아내는 요란한 사랑이라면 부모님, 가족 간의 사랑은 너무 조용하고 온화해서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듯 없는 듯, 너무 조용하고 고요해서 그 소중함을 아예 감지조차 못하는 저수지처럼, 부모님의 사랑은 그들이 나이 들고 지쳐 병들 때까지 자식들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눈치를 채더라도 그 깊이를 이해하고 가늠하기는 너무나 힘들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다 보면 문득문득 어머니, 아버지와의 지난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 자신의 모습에 겹쳐 보이는 젊은 시절의 ‘엄마’, ‘아빠’를 그리며 차츰차츰 깨닫게 되는 지난 시절, 그들의 노고와 사랑에 보답하려 마음먹을 때쯤이나 되어서야 보답을 할 시간이나 기회는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침내 이해하게 된다.
그들의 사랑과 보살핌이 얼마나 크고 위대했었는지.
# 3 우정: 알고 보면 값비싼 인연
‘친구 아이가’라는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우정이라는 미명 하에 어떻게 보면 무모할 정도로 감싸주고, 앞뒤 가리지 않고 도와주는 관계를 친구 사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특히,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며 모르는 것 없이 친밀해진 사이에는 한쪽이 다른 쪽을 함부로 대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당연하게 여기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마치, ‘친구니까’, ‘친구라서’, ‘친구이기 때문에’를 강요하거나, 밤낮으로 기대하거나,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들이 생기는 것이다.
자고로, 친구는 아낌없이 내어주고 도와주는 게 미덕이라고 했지만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상대방의 기분이나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서운함만 앞세운 채 한쪽이 원하는 것을 강요만 한다면 진정한 친구는 사라지고, 다시는 얻지 못할 좋은 우정을 잃었다는 상실감과 함께 후회만 남을 것이다.
친구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있어 줄 때 잘해야 한다.
# 4 세대 차이: 때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것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청년은 세상 두려울 것이 없고 에너지가 넘친다. 반면, 이제 중년을 지나 장년으로 넘어가는 50, 60대 어른은 이미 여러 차례 세상을 겪으며 힘은 빠졌지만 이를 상쇄할 만큼 많은 노하우가 생겼다. 하지만 그 노하우가 현세대의 청년들에게 적용된다고 볼 수 도 없는 터라, 이런 이유로 다른 세대에 섣불리 접근하게 되면 소위 말하는 세대갈등이 발생한다. 즉, 청년은 자신의 실정에 맞지 않는 조언이 필요 없고, 장년은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청년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뻔히 알지만 청년이 원하는 대로 알려줄 길이 없다.
하지만, 삶의 해답은 30대가 되고, 40대가 되어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보인다. 마치, 안갯속에 싸여있던 풍경이 아침 햇살에 안개를 걷고 얼굴을 내밀듯 당시 그 어른들이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그냥, 그냥 저절로 알게 된다. 옳다고 여겼던 자신의 행동과 판단이 사실, 그렇게 옳지는 않았었다는 것을.
그 시간이 되니, 그 위치에 가니 비로소 깨닫고 알게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걸 아주 자연스럽게, 조언스럽지 않게, 충고로 느껴지지 않게 전달할만한 방법은 딱히 없다는 것 까지도.
# 5 직장, 불만: 결국 내 미래에 겪을 눈 앞에 보이는 과거
이들 만큼 서로에 대한 이해와 상황 설명이 어려운 곳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매해, 여러 회사에서는 수많은 신입, 중간 경력자, 사장을 포함한 관리자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알력이 무수히 발생한다. 그리고 그 갈등의 양상은 보통 아래에서 위로, 대개 이런 한마디의 불만으로 시작된다.
‘아니, 과장님은 왜 맨날 저 일을 쳐내지 못하고 받아오는 거야?’
‘아니, 부장님은 왜 자꾸 퇴근 5분 전에 업무 메일을 보내시는 거야?’
‘아니, 이 회사는 기본 시스템이 이렇게나 안 되어있나? 아무리 스타트업이라지만 다들 어떻게 일한 거야?’
‘아니, 여긴 도대체 원칙이 없나? 다들 어떻게 일하는 거야?’
‘아니, 이 사람들은 지난 수년간 어떻게 여길 다닌 거야? 월급만 받으면 다 괜찮은 건가?’
그리고 이런 불만의 끝은 항상 함께 경영진과 대립하다 퇴사하거나 조용히 이직을 준비한 뒤 회사를 나가버리는 식으로 끝난다. 나도 그랬다. 대립하며 싸우기도 했고, 조용히 이직을 준비한 뒤 슬며시 나간 적도 있다. 회사 내에서의 갈등은 워낙 다양하고 복잡하기에 정답도 없거니와 모두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성인들이라 무엇이 답이라고 쉽게 단정 지을 수도 없다. 하지만 시행착오와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 등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잠시 삶을 돌아보며 느꼈던 점을 소회 해보면 대부분 이런 결론에 닿게 된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타협이라고 욕할 수도 있고, 지금 당장은 아둔해 보인다고 무시할 수 도 있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삶을 위한 레이스를 펼치는 중이고, 삶의 레이스는 단거리가 아닌 장거리 마라톤과 같기에 어찌 보면 아주 돌아가는 길처럼 보일지라도 알고 보면 그 길이 ‘정도(正道)’였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다.’
나만 정의롭고, 나만 깨어있고, 나만 제대로 된 길을 가는 것이 아닌, 오히려, 과거 그들의 그런 선택과 방법이, 시간이 흘러 내가 그 자리에 가고, 그 역할을 할 때 돌아보면 ‘아, 그래서 그랬구나. 이 방법이 틀린 방법이 아니라, 어쩌면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구나.’라며 그들을 이해하며, 그렇게 또 한 세대가 다른 세대에게 사회의 역할과 무대를 넘겨주는 시간이 오면 비로소 알게 된다.
세상에는 역할, 나이, 공간, 지역, 위치, 성별 등 특정한 이유로 인해 지금은 아무리 설명해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그것을 설명하자면 구차해서 변명 같고, 설사 설명해도 지금은 알아들을 귀도, 이해할 마음도, 그걸 볼 수 있는 눈도 없기에 받아들일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르고 역할이 주어지면 굳이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알고 보니 그것들이 가족을, 사회를,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고 원동력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들이 당장은 이해할 수 도, 받아들일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지금은 알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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