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_특별한 계절

너무 적어서 아쉬운, 꾹꾹 숨겨둔 감성이 터지는 그런 계절

by Rooney Kim

학창 시절, 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앞으로 내게 몇 번의 크리스마스가 남았을까?’


당시 내 나이가 대략 17세 정도였던걸 감안해서 그 시절 평균 수명 기준으로 70~80세 사이를 산다고 가정해보니 약 60 여 회, 80세까지 산다고 감안해도 63회가 남았다는 것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지금은 평균 수명이 조금 더 늘었으니 몇 회 더 늘었을 테고 게다가 수명은 개인차가 있으니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여하튼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한 사람의 삶이 그렇게 길지 않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었다.


아무튼 그 시절, 십 대였던 나는 매년 겨울이면 영원히 올 것 만 같은 크리스마스 시즌이 사실은 평균 수명 정도는 꼭 살아줘야 이제 60여 회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다. 현재 내 나이가 38세임을 감안하면 80세까지 산다고 해도 내겐 42회의 크리스마스가 남았다. 지금도 매년 나를 들뜨게 하는 크리스마스 캐럴과 얼음장 같은 온도 속에서 누릴 수 있는 따스함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계절이 이제 약 40~50여 회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marina-khrapova-nE4CsEL9Z_s-unsplash.jpg 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설레는 시즌의 최고봉, 크리스마스 시즌

크리스마스 시즌에 대해서는 누구나 비슷한 추억이 있을 것 같다.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운 겨울, 따뜻한 옷과 목도리로 온몸을 감싼 채, 시내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가슴 설레는 크리스마스 캐럴에 들뜬 채 몇 주를 보내다, 어느새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이브와 성탄절엔 사랑하는 가족, 친구, 연인끼리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포근한 겨울을 맞이하던 그런 추억. 만약, 눈이라도 내리면 신난 강아지 마냥 달려 나가 자연을 만끽하며 그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가득 찬 행복감을 누리곤 했던 기억 말이다.


그런데 내게 매년 기다려지는 이런 선물 같은 특별한 계절은 비단 크리스마스 시즌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에겐 아래와 같이 매년 손꼽아 기다리는 날들이 있다.


# 1 추적추적, 비 오는 날


연평균 강수량이 1,100mm에 달하는 우리나라지만 요사이 수년 간은 비가 너무 안 와 비다운 비를 즐길 수 없었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하다. 연간 비가 적게 오면 가뭄, 산불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자연과 인간에게 걱정거리를 안겨주게 마련이지만, 나는 사실 조금은 감성적인 이유로 아쉬움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겠지만,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는 날의 청량감은 마치 샤워를 하지 않았는데도 방금 막 샤워를 한 것만 같은 상쾌함을 전해준다. 그런 폭우 속에서 소파에 가만히 누워 창 밖을 바라보거나, 머리를 가득 덮을 정도의 포근한 베개를 베고 빗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면 특유의 편안하고 아늑한 감성에 젖어든다. 비 오는 날, 집 안에서의 특유의 안전함 속 포근함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봤을 테다.


suhyeon-choi-HCDugQDdtfc-unsplash.jpg 비가 쏟아지는 날의 실내는 아늑함 그 자체다

어린 시절, 베란다 밖으로 쏟아지는 비를 보며, 소파에서 뒹굴대며 놀던 여름 방학에서부터 서울로 올라와 옥탑방에서 자취하며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에 밤새 요란한 행진곡을 연주하는 양철 지붕까지. 투닥투닥 창문을 때리며 꽉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빗소리에는 묘한 치유능력이 있다. 오죽하면 편안한 잠자리를 위한 빗소리 ASMR까지 있을까. 그래서 이제는 봄이 오고, 여름이 되면 청량한 비가 쏟아지는 날을 기다린다.


# 2 별이, 별빛이 넘치는 밤


나는 아직도 25년 전, 넓은 평원이 있는 어느 높은 산의 여름밤을 잊지 못한다. 별이 쏟아질 것 같다는 표현은 문학작품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광경을 실제로 보고 나니 정말 쏟아진다는 표현 외에는 달리 좋은 표현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 밤, 그 밤하늘을 여전히 잊지 못하겠다.


그렇게 종종 그런 밤하늘을 그리워만 하던 중, 2016년 어느 가을밤, 국토정중앙 천문대 캠핑장에서 홀로 차박을 하면서 어린 시절 보았던 그 밤하늘과 다시 마주했다. 25년 만에 다시 본,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저 깊은 은하수의 심연에 빠져 별들 사이에서 헤맬 것만 같은, 온 세상의 근심과 시름이 사라지는 순간을 만끽할 수 있는, 별이 넘쳐흐르는 밤이었다. 그리고 다시, 언젠가 마주할 그런 밤을 기다리며 좋은 기회를 엿보고 있다.


taylor-leopold-Rr9zn33OMbk-unsplash.jpg 정말 이 정도의 별이었다. 별들에 압도되는 기분은 가히 최고의 굴복이라고 할 수 있다

# 3 내 마음마저 하얗게 채워버리는, 눈 내리는 날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을 심산으로 내리는 눈으로 가득한 겨울의 어느 날은 또 어떤가. 빙판길과 눈 녹은 거리에 대한 걱정은 뒤로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눈 앞의 스트레스는 뒷전으로 하고 온 마음이 새하얗게 깨끗해지는 기분에 정신마저 맑아진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는 눈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고향인 마산의 특성상 눈이 잘 오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 기쁘게 날 뛰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기쁨을 친구와 함께 공유하기 위해 공중전화를 찾아 친구 집에 전화를 했다. 친구 어머님이 받으시길래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기분이 좋아 친구에게 전해주기 위해 전화했다고 말씀드렸다. 친구 어머니는 웃으셨고, 친구는 뭐 이런 걸로 전화하냐고 비웃었지만, 난 너무 좋았다. 물론, 군대를 제대한 뒤로는 눈에 대한 텐션이 살짝 낮아지긴 했지만, 눈 내리는 날은 여전히 설렘으로 가득하다.


craig-whitehead-QKfWXNtb1CU-unsplash.jpg 그 끝이 미끄럽고 지저분할지라도, 쓰레기라고 부르지 말아 줘요. 사실, 지저분해지는 건 눈의 탓이 아니니


# 4 가끔은 이유 없이 홀려버리는, 새벽


물안개와 산안개가 두둥실 길을 가로막는, 짙은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또한 우리 안에 숨어있는 진한 감성을 끄집어내기엔 제격이다. 느릿느릿하지만 마치 홀리기라도 하듯, 나의 마음을 빼앗는 새벽녘의 희끄무레한 볕이 온통 새까만 밤하늘을 뚫고 조금씩 대지를 지배할 때, 그 사이를 유령처럼 누비며 이리저리 스르르 스르르 기어 다니는 안개들이 어느덧 산을 타며, 햇살을 붙잡고 사라질 때의 말끔하고 선명한 자연을 보고 있노라면, 그 몽환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주는 감성이 하루 온종일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누가 그랬던가. 새벽에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열렸다 닫히는 아주 짧은 시간이 있다고. 그래서일까, 가끔은 새벽의 차갑고 알싸한 공기와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미묘한 하늘이 너무나도 매력적이라 새벽 거리를 마냥 걷고 싶어 질 때가 있다. 그렇게 새벽에 홀려 정처 없이 걷다 보면 그 끝이 출근이든, 등교든, 지각이든, 한 차례 새로운 단계를 밟은 느낌마저 든다.


agence-producteurs-locaux-damien-kuhn-ncQYsg5H5QQ-unsplash.jpg 새벽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마치, 차원의 문을 통과한 듯 잠시나마 전혀 새로운 세상과 조우하게 된다


짧아서 더 고픈, '특별한 계절'


1년에 한 차례 찾아오는 크리스마스, 1년에 약 2~30여 일을 즐길 수 있는 빗소리가 투닥대는 밤, 38년 동안 두 번 정도 경험한 별 빛에 온몸을 담글 수 있는 은하수가 쏟아지는 밤하늘, 한 겨울, 며칠 정도만 볼 수 있는 폭설이 아름다운 밤 그리고 1년에 한두 번 경험할까 말까 한 몽환적인 새벽까지.


우리의 삶을 풍요로운 감성으로 채워주는 ‘특별한 계절’.


우리의 삶은 긴 듯 짧고, 짧은 듯 길지만 이런 특별한 순간은 항상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물론, 사는 곳의 환경, 직업의 특성상 이런 현상과 자주 마주하는 경우는 예외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그래서 소중하다. 내가 얼마나 살지는 모르겠지만 평균적인 나이를 살아간다고 해도 내 삶의 계획을 돌이켜보며 계산을 해보면 하나하나가 그렇게 많지가 않다. 그래서 더 소중하고 더 그리워진다. 그냥 ‘아쉽다’라고 표현하기엔 그것마저 아쉽다.


alex-machado-80sv993lUKI-unsplash.jpg 그저 바라만 봐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파란 하늘과 흰 구름처럼

누군가에게는 싫은 날이거나 보통날이라도 내겐 좋은 날. 그 날 그 날이 특유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나의 지친 마음과 일상을, 때론 시원하고, 때론 따뜻한 감성으로 부드럽게 휘어잡는 아주 특별한 계절이 있다. 예전에는 이런 계절을 자주 누리기 힘들고, 또, 시간이 흐르면서 누리지 못하는 시간이 아쉽다는 생각에 조금 서운한 기분만 들었었는데, 살면서 또 다른 특별한 감성을 심어주는 새로운 계절이 조금씩 추가되다 보니 오히려 1년 내내 색다른 감성으로 새로운 계절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덕분에, 우리의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특별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주황빛 백열등 스탠드가 아늑히 방 안을 채우고, 방금 타놓은 아이스 카페라테가 손 내밀면 닿을 거리에 있고, 중저음의 둔탁한 사운드가 살아있는 무선 스피커 너머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라드가 흘러나오며, 곧 이어질 아이유의 감성 터지는 목소리와 박정현의 소울 풀한 선율이 내 귀와 감성을 또 마구 흔들어 놓을 예정인데, 아, 그러고 보니 이 시간도 내겐 ‘특별한 계절’이다.





[이미지 출처]

*메인 이미지 및 모든 이미지: Unsplash https://unsplash.com/search/photos/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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