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이 필 무렵 5부

진실

by Rooney Kim

선준과 행장이는 구미호 여인이 일러준 대로 동쪽 백유산의 정선사를 찾아갔다. 거의 한나절을 달려 당도한 정선사는 고즈넉했고 사찰 내 곳곳에서 여유로움과 따뜻함이 묻어났다. 필시 보통 절은 아닌듯했다. 만나본적도 없는 이곳의 주지스님의 인덕이 얼마나 훌륭할지 기대도 되고 이미 느껴질 정도였다. 이는 비단 선준만의 느낌은 아니었다. 행장이도 연신 절이 마음에 든다며 여기서 하룻밤을 묵고 가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둘은 곧 정선사의 주지스님인 중방 스님을 만났다. 중방 스님의 인자한 표정과 그 뒤에 숨은 도력에 사찰 입구에서 느낀 상서로운 기운이 이해가 갔다.


선준이 소천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중방 스님의 표정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는 선준에게 소천을 어떻게 아는지 물었다. 선준은 자신의 이름과 어린 시절부터 소천 스님이 자신을 기르다시피 했다고 하자, 시종일관 평온한 표정을 짓다 눈이 똥그래지며 놀라는 표정을 보였다.

“혹시 자네가, 그 선준이오? 소천이 거의 키우다시피 한 선준말이오.”

선준은 스님이 자신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어찌 보니 낯이 조금 익은 것도 같았다. 선준은 중방 스님과 같이 지낸 적이 없었지만 중방 스님은 어린 시절부터 소천과 친구였고 소천이 스님이 되는데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스님이 된 이유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소천이 내게 잠시 보관하라고 주고 간 게 있는데, 필시 오늘을 위해 내게 준 것이었구려. 잠시만 기다려보시오.”

선준 역시 뜻하지 않는 인연에 얼떨떨한 기분도 들었지만, 구미호 여인이 자신을 여기로 보낸 것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곧 중방 스님이 작은 상자를 하나 가지고 나왔고 이를 건네받은 선준 이윽고 그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어여쁜 여인의 얼굴을 그린 그림과 서간 그리고 분홍색의 노리개가 하나 있었다. 알고 보니 선준이 어린 시절 소천 스님에게 받았던 노리개의 문양과 황금장식이 동일한 한 쌍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노리개가 드디어 짝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곧 서간을 읽어보았다.


‘선준 보거라, 내 어찌 너를 이리도 못 알아보았단 말인가. 다만, 이제 너를 보지 못하고 떠날 것이 아쉬우나 이 모든 것도 나의 전생의 업보 때문이 아니겠나 싶구나. 평생을 수도하며 가족도 없이 사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 믿었건만, 괜히 나로 인해 애꿎은 너만 기구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한 것 같아 그것이 사무치도록 미안하구나. 어쩌면 이번 생에는 살아서 보지 못할 것 같으니, 이를 보거든 그림 속의 여인을 찾아가거라. 남원 지방의 윤대감 댁 셋째 손녀, 그 여인이 네 어머니다.’


‘나를 못 알아보았다는 것이 무슨 말씀이시지?.. 그리고 남원지방의 윤대감이라면.. 뭐라, 그 악령이 된 윤대감 말인가. 그 셋째 손녀가 내 어머니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스님, 죄송하오나, 퍼뜩 이해가 가지 않아 좀 여쭙겠습니다. 소천 스님이 남기신 이 서간이.. 정말 진실이옵니까? 저는 전혀 모르던 내용들이라..”

중방 스님은 잠깐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선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였지만 소천도 없는 지금 이를 다 알려주는 것이 아직 한창나이의 선준의 남은 생에 도움이 될지 고통이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소천의 생은 세상을 떠나고도 여전히 이어지는군요. 사실, 소천이 내게 이 상자를 맡겼지만 난 한 번도 서간을 읽어 본 적이 없다오. 그래서 그 서간에 무엇이라고 쓰여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소천의 지난 과거에 대해서 이제는 알려주리다.”


중방 스님은 멀리서 오느라 지친 선준과 행장이를 별채로 데리고 갔다. 버섯과 나물밥을 실컷 먹은 행장이는 별채에 붙어있던 부속 방의 아랫목에서 금세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중방 스님은 곧 숨겨진 이야기를 해주었다.

“소천은 원래 남원지방의 이가네 둘째 아들이었답니다. 장사치였던 아비를 따라 인근 고을을 돌며 물건 등을 떼와 파는 일을 했지요. 아비의 수완이 제법 괜찮아 농사를 안 짓고도 꽤 먹고살만했다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시장에 놀러 온 규슈댁의 여인들을 마주쳤지요. 그 집안은 다들 미모가 출중하고 인성도 훌륭했는데 그중 셋째, 즉, 윤대감의 셋째 손녀가 소천의 눈에 들어온 겁니다. 아, 그런데 윤대감에 대해서는 잘 아시오?”

“네.. 이제는 정확히 알고 있답니다.”

“그러하오? 아무튼 윤대감의 무시무시한 업보를 해소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윤대감의 자식들과 또 그들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인성이 훌륭했다오. 소천이 셋째인 청임에게 홀린 듯이 반한 이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윤대감네를 얼씬거리며 청임과 마주치길 바랐다지요.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요. 몇 번을 마주친 둘은 집안 몰래 사랑에 빠졌고, 소천은 청임에게 청혼을 합니다. 하지만 당연히 윤대감네에서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둘을 완전히 떼어놓았지요. 여전히 엄청난 부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윤대감 댁의 눈치에 결국, 소천은 가족들로부터 떨어져 다른 고을에서 지내며 홀로 떠돌다 절로 들어가게 되었지요. 하지만 문제는 청임이었답니다. 당시, 청임은 소천이 다른 고을로 쫓겨난 후에야 자신이 회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소문이 퍼질세라, 집안에서는 임신중절을 권유했다지요. 하지만 청임은 또다시 업보를 쌓을 수 없고, 풀어야 할 할아버지의 죄 또한 많다는 말을 남기고, 곧 아이를 출산하게 됩니다. 곧 청임은 작은 집을 하나 얻어나갔지만, 집안에서는 이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청임 몰래 아이를 빼돌렸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어느 양반가에 입양되었다가, 아이의 소문을 들은 후 파양 되어 여기저기 떠돌다 결국 무주 지방의 한 절로 들어가게 되었지요. 거기서 처음 소천과 만난 겁니다. 하지만 소천은 평생토록 그 아이가 자신의 아들인지도 모르고 키웠어요.”

“그렇다면.. 소천.. 스님이 제.. 제 아버지라는 말씀..”

“그렇지요.”


선준은 넋이 나간 듯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자신의 평생 은인이자 스승이라 믿었던 소천이 자신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에 그동안 그토록 그립고 미안했던 감정이 더욱 북받쳐 결국 넘치는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중방 스님은 어깨를 들썩이며 숨죽여 우는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고생이 많았소. 아버지를 찾았으니 이제 어머니도 찾아야지요.”

“소.. 소천 스님, 아니, 저희 아버지의 유골을 찾아 넋을 기려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윤대감의 악령이..”

중방 스님은 겨우 울음을 그친 선준의 양쪽 어깨를 잡으며 다독였다.

“맞아요. 그러려면 잠시 울음을 그치시지요. 아직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선준은 붉어진 눈시울을 훔쳐내고 다시 중방 스님을 바라보았다. 스무 해가 넘도록 안갯속에 숨겨져 있던 진실과 출생의 비밀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니 평생에 걸쳐 한과 궁금증으로 막혀있던 가슴이 조금씩 뚫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아이를 빼앗긴 청임은 홀로 이 마을, 저 고을을 떠돌며 아이를 찾으러 다녔지요. 아이가 입양되었다는 양반집에도 갔으나 아이는 이미 없었고 결국 어느 산속의 절간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한밤 중에 산속을 헤매다 결국..”

“어떻게 되었나요. 설마..”

“아마도 호랑이에게 물려간 것 같다더군요. 청임은 실로 소천과 제가 있던 절의 산 어귀까지는 왔던 것 같습니다. 호환이라는 소문에 절 주변과 산 어귀를 보수하러 둘러보던 중 노리개를 하나 주었지요. 하지만 소천에게는 이를 알리지 않았답니다. 그저 한 여인이 호환을 당한 것 같다고만 했지요. 노리개를 보면 소천은 복수를 하러 떠날게 뻔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복수의 대상이 누구며 복수를 해봤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 아니오. 소천은 죽는 날까지 청임이 어느 양반가와 혼인을 맺고 가정을 이루며 잘살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오.”

“아, 상자 안에 노리개가 있었는데 그것이..”

“네, 맞습니다. 원래 소천이 보관하던 노리개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것과 똑같더군요. 그래서 후에 제가 그 상자에 넣어두었지요.”

“그 노리개는 지금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소천 스님.. 아니, 아버지께서 제가 어린 시절에 주셨지요.. 그렇다면 청임.. 저희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나요. 호환을 당하신 건지요..”

“그런 것 같소만, 허나, 이 또한 불분명하답니다. 분명 호랑이 같은 것에 물려간 것 마냥 신과 노리개가 여기저기 흩어져있었지만 호랑이 굴과 일대의 음침한 곳을 뒤져도 사람의 시신이나 유골이 나오지는 않았지요. 그래서 행방이 묘연하다고만 들었습니다. 하지만, 살아있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필시 어딘가에 잡혀 간 것은 맞아 보였지요. 보통, 젊은 여인이 한을 품고 죽게 되면 처녀 귀신과 같은 한 맺힌 혼령이 되거나 원한이 넘쳐 구미호와 결탁하여 사람들의 피와 생간을 먹으러 민가에 내려오기도 하는데 그것도 모르는 일이지요.”


선준은 중방 스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불현듯 여인의 그림이 떠올라 다시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아까 허투루 봤던 여인의 그림을 다시 펼쳐보았다. 선준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신귀사의 어귀로 가던 산속 민가에 있던 바로, 그 구미호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 여인은..”

“그렇소. 청임. 당신의 어머니 라오. 소천이 일생토록 간직하던 그림이었기도 하지요.”

“이.. 이 여인이 제게 동쪽의 백유산 속 정선사로 찾아가라고 서간을 남긴 여인이옵니다.. 이 여인이 저희에게 물과 밥도 차려주고 행장이가 아플 때 처치도 해주었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제.. 제 어머니였다니요..”

중방 스님은 안타까움과 따스함이 섞인 눈빛으로 선준을 바라보며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선준의 어머니는 살아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호환을 당했거나 어딘가에 납치되었기 때문이었다.

“구미호였어요. 그 여인.. 제 어머니는.. 어쩐지 아무런 악의도 느껴지지 않고, 그저 자신의 지아비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했지요. 그리고 저와 행장이를 몹시 따뜻하게 대해주었답니다..”

중방 스님은 이제 모든 것을 알겠다는 듯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출생의 모든 비밀과 어머니와 아버지의 지난 슬픈 과거를 일시에 알게 된 선준은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사무친 감정이 사라짐과 동시에 부모의 슬픈 한을 달래주지 못했음에 통탄의 울음을 다시 한번 쏟아냈다. 선준이 자신의 슬픈 과거에 대한 한을 내뱉는 동안 부속 방에서 어느새 잠을 깬 행장이도 선준의 사연을 듣고는 선준에 대한 동병상련의 감정과 함께 행장이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에 어깨를 들썩이며 숨죽여 울고 있었다.


그렇게 정선사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에피소드가 1화 추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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