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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ney Kim Jan 25. 2021

기묘한 이야기: 누구나 아픈 과거가 있다

그리고 아픔은 연결되어 있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지극히 비유적인 감상문으로 소극적인 스포와 적극적인 작가 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고통의 참견


아파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픔이란 육체적인 고통뿐만이 아닌 마음의 고통 즉, 슬픔이나 분노로 인한 스트레스는 물론, 더 나아가 본인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신경, 정신적인 손상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상태를 말한다. 자신의 물리적인 아픔은 타인이 느낄 수 없다. 누군가 아플 때 ‘자신도 그 고통이나 슬픔’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로부터 불러온 유사한 육체적인 상처의 고통, 시련으로 인한 가슴 아픈 기억 등 여전히 ‘자신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타인의 아픔에 대한 소극적인 공감’ 일뿐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지나온 그 고통의 기억은 이미 과거에 벌어진 후 치유된 ‘종료된 사건’에 불과하다. 그 아픔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머물러 있고 완치라는 과정 그리고 이후, 흘러간 시간의 갭(gap)이 당시의 고통을 미화시켰을 확률이 지극히 높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경우,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무런 대책 없이 무책임한 말을 쉽게 내뱉곤 한다.


“괜찮아, 나도 겪어봤어. 그 고통.. 잘 알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 조금만 견뎌.”


그 이후에도 상처가 낫질 않고 고통이 지속되면 사람들은 점점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해진다.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그 상처와 동일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외려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쟤는 왜 아직도 저런 걸로 힘들어하니? 나도 겪어봤어. 그 아픔을 안다고. 그러니까 ‘이렇게, 저렇게’하면 되는데 왜 안 해? 그러니까 아직도 아픈 거야.”


과연, 이들은, 아니 우리는 그동안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바라본 걸까? 혹시, 그저 자신의 유사한 경험에 빗대어 섣부른 간섭만 했던 건 아닐까.


판타지 세계


윌, 더스틴, 루카스, 마이크는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로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단짝 친구들이다. 보드게임인 ‘던전 앤 드래곤’은 오직 이들만 오롯이 공유하며 떠날 수 있는 판타지의 세계로 그 안에서 서로 신뢰우정을 나누며 강력한 유대감을 느낀다. 매번 늦은 저녁까지 마이크 네의 지하실에서 보드게임을 하며 ‘그들 만의 판타지의 세계'에 흠뻑 빠져 노는 것이 일상인 그들에게 이는 가장 중요한 사회화 과정이었다.


저녁 늦게까지 마이크의 지하실에서 ‘던전 앤 드래곤’ 게임을 하다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날 밤이었다. 귀가 중이던 윌은 평소와는 다른 지름길을 통해 집으로 돌아간 후, 수상한 괴생명체에 의해 쫓기다 결국 납치되고 만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의 미스터리한 에피소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윌은 기묘한 세상에 갇혀 버린 것이다.


누구나 아픔은 있어


‘기묘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사정과 아픔이 가득하다. 현실 세계의 반대 세상인 ‘The upside down’으로 끌려간 윌의 고통에 비할바가 있겠냐만도 저마다 크고 작은 상처와 아픔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윌의 엄마인 조이스는 남편과 이혼 후 외벌이로 두 아들을 기르는 중인 억척스런 아줌마다. 왜 아줌마라고 하느냐면, 8090년대 핫한 여배우의 아이콘이었던 그녀(위노나 라이더 분)의 극중 행동, 행색, 말투에서 보통 미국의 엄마가 아닌 마치 한국의 엄마에게서나 느껴질 법한, 수더분하면서도 고집스럽고 강한 모성애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첫째 아들인 조나단은 학교에선 왕따지만,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엄마몰래 파트타임 알바까지 하며 벌써 사회의 무게를 감내하는 중이고, 경찰서장인 호퍼는 과거 어린 딸을 잃은 상실감을 가슴에 묻은 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으며, 실험실에서 도망쳐 나와 가족을 찾는 엘과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하며 다른 이들을 구하는 밥(시즌 2), 폭력으로 얼룩진 학대 가정에서 자라 천하의 말썽꾼이 되어 시즌 3의 에피소드를 이끄는 빌리 그리고 부유하지만 자신과 가정에 무관심한 남편으로부터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끼는 마이크의 엄마인 카렌까지, 주변에는 각자 삶의 상처와 고통이 현재 진행형이거나 여전히 곯아 터지기 직전의 사람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모든 아픔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대부분의 아픔은 사춘기의 아찔한 현기증 마냥 스쳤다 사라지기도 하고, 혼자 감내하거나 혹은 가족이나 의학의 힘을 잠시 빌려 비교적 단기간에 해결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 고통이나 슬픔이 가볍다거나 덜하다는 뜻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은 ‘내 고통’이니까.


눈으로는 결코   없는 


그래서 조금, 아니 조금 더 깊이 들어간 시각으로 이 시리즈를 마주해보았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누가, 어떤 고통으로 얼마나 힘든 삶을 나고 있는지 우리는 제대로 알 수 없기에, 때로는 자신의 시선이 진정 제대로 된 세상을 보고 있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이는 비단 아픔이나 질병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목소리와 태도를 가진다. 하지만 여기에도 보이지 않는 세상의 기준이 있다. 만약 누군가의 목소리와 태도가 그 기준에 부합하면 그는 합리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이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주변 사람들과 사회는 그를 비사회적이고 비합리적인 사람으로 규정한다. 일정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원하는 기준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이후 누구도 그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픈 사람들은 오죽할까.


기묘한 이야기의 윌의 고통은 소위 말하는 ‘보통의 아픔’과는 조금 다르다. 윌이 산 채로 납치된 ‘The upside down’에서의 공포와 고통은 상상 이상이다. 그곳에 갇힌 윌 현실의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지만, ‘일상적인 기준으로 점철된 시각’으로는 결코 윌을 듣거나 볼 수 없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윌은 어떤 신경 정신적인 고통에 다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고통에 대해 얘기하며 내뱉는 설명들은 하나같이 ‘비현실’적이라, 몽매한 인간들이 이를 보고 들을 눈과 귀는커녕, 시간적인 여유도 없다. 이는 가족에게도 해당한다.


사람들이 날 듣지 않고 보지 않아!
아무도 날 느끼지 못해. 이보다 기묘한 일이 있을까.
하지만 저들은 내가 기묘하겠지. 미쳐버린 사람이라 생각하겠지.
지금의 나를 멀리하고 과거의 '온전한' 나만 찾고 싶은 거야!


에피소드의 주요 내용인 기묘한 세상들의 괴물들과 싸우는 틀에서 벗어나 윌의 고통과 상황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 안에 숨어있는 평범하지 않은 고통에 대한 처절한 사투가 보인다.


잠식

병에 정복당한 윌 하지만 윌은 끊임없이 구해달라며 신호를 보냈고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생존을 알렸다. 자신을 찾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고, 전구를 반짝여 빛으로 구조 신호를 보내고, 이 신호의 반짝이는 횟수와 알파벳을 대입해 메시지를 보냈다. 즉, 윌은 지극히 단순한 의사소통 조차 입 밖으로는 꺼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윌을 직접 눈으로 봤다면, 아마도 눈이 뒤집힌 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읊어대는 '광인' 정도로 보일 것이다. 헛것이 보인다며 괴물이 자신을 잡으러 온다며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는 ‘정신 나간 아이’ 말이다. 세상에 그 누가 평범한 벽 뒤에 자신이 갇힌 세상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겠는가? 보통의 부모였다면 아마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윌은 그렇게 홀로 고통에 잠식당하는 중이었다.



용기

하지만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빠진 아이를 진심이 담긴 눈과 귀로 이해하고, 그의 비정상적인 행위와 발작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결국 문제를 찾아내며, 이 때문에 그녀도 미쳐버렸다며 고개를 내젓던 다른 사람들까지도 감화시킨 사람이 있다. 윌의 엄마 조이스다. 진정한 모성애의 발현이며 위대한 승리다. 조이스는 남들 눈 아니, 가족의 눈에도 미친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윌의 의사소통’ 방법을 받아들였고, 집 안 곳곳을 수십 개의 전구선으로 연결해 매달고, 거실 벽은 알파벳으로 도배했으며, 윌의 말대로 벽을 뚫어 윌이 갇힌 세상을 현실에서 직접 마주한 첫 사람이었다.


병에 잠식당해 죽어가던 윌의 숨통을 처음으로 터줬던 것이다. 덕분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미쳐가는 줄만 알았던 윌의 엄마가 사실은, 자신들은 보지도, 아니, 볼 생각조차 못했던 윌의 세계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윌의 상태를 받아들인 것이었고, 이제 다 함께 싸워야 윌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진단

윌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윌처럼 같은 병을 안고 해당 세상에 갇혀있다 빠져나온 엘의 활약으로 마침 낸 구출된 윌. 그의 몸은 현실로 돌아왔지만 정신은 여전히 그 ‘병’과 연결되어있다. 윌은 이제 현실에서 발작을 일으키거나 자신의 증상을 ‘보통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외부에 알린다. 그리고 문득문득 보이는 환영과 환각을 그림으로 남긴다. 이런 현상을 보면 이제 보통사람들도 이 병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환각, 환영, 망상, 행동이상 등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만성 사고장애로 정신질환 중 가장 극단적인 증상을 동반하는 병이자 일상생활의 심각한 장애와 위험성을 초래하는 정신증의 대명사, 조현병 말이다.


울타리

현실로 돌아온 윌이지만 여전히 환영과 발작이 자신을 괴롭힌다. 하지만 윌이 극복해야 하는 것은 병뿐만이 아니다. 그저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마음껏 환상의 세상을 누비 ‘던전 앤 드래곤’을 하고 싶은 윌의 마음과는 달리 친구들은 그가 아픈 사이 조금 더 성장해있었다. ‘판타지의 세상’에서 막 빠져나온 친구들은 ‘이성’에 눈을 뜨며 ‘환상’보다는 ‘현실’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고통스럽던 ‘The upside down’에서 마을로 빠져나오면 당연히 되찾을 것이라고 했던 친구들과의 현실 역시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여전히 ‘던전 앤 드래곤의 판타지의 세계’가 삶의 재미였던 윌에게 남은 건, 병으로 인한 고통뿐만 아니라, 자신이 아픈 사이에 훌쩍 커버린 친구들 사이에서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외로움과 허전함이었다.


윌은 이제 병의 울타리는 물론, ‘유년의 울타리’도 뛰어넘어야 한다. 보호받고, 예쁨 받고, 어른이 안내해주던 동화 같은 시절이 끝나간다. 대신, 자신이 선택하는 것들에 대한 책임을 배우는 시절로 넘어가고 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이성과 사귀며 관계에 대한 책임을 배워야 하며, 감정적으로 폭주한 결과에 대해서는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조금씩 몸소 배우는 시절 말이다.


파괴는 새로운 세상


윌은 혼란스러웠다. 병은 아직 자신을 괴롭히는 중인데 곁에 있는 친구들은 조금씩 멀어진다. 정의의 칼과 방패로 데모고르곤을 무찔러야 하는데 판타지의 전장에 함께 갈 파티원(party)이 없다. 캐슬 바이어스(Castle Byers, 윌이 만든 작은 오두막)로 달아나 보지만 항상 곁에 있던 친구도, 유년의 막바지에 도달해 이를 함께 극복할 친구도 없이 홀로 남은 아이가 된 것이다.


윌의 동심의 정점이자 전초 기지였던 ‘캐슬 바이어스’. 윌은 비로소 시절의 변화를 마주하고, 이제는 이를 받아들일지 말지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리고 방망이를 들고 자신이 가장 아끼던 ‘캐슬 바이어스’를 스스로 부수기 시작한다.



윌은 책을 읽으며 신나는 모험에 빠져 잠들던 오후, 친구들과 전쟁놀이를 하며 지샜던 밤의 모든 과거를 그저 추억으로 접어둔 채, 안락했던 유년기를 급속도로 끝내버린다. 변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새는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


성장과 전투는 끝나지 않아


기묘한 이야기는 시즌을 더해가며 더 많은 사람들이 The upside down의 괴물과의 전투에 동참한다. 어떤 이는 초능력으로, 어떤 이는 해박한 지식으로 그리고 어떤 이는 자신만의 주력 무기로, ‘윌’이 홀로 겪던 고통에 다 함께 맞선다. 윌 겪던 고통의 세계를 그저 인지하는 단계에 그치지 않고 다 함께 적극적으로 싸워나가는 것이다.


‘기묘한 이야기’는 아이들이 커가는 성장 이야기, 성인이 되어가는 청소년들이 겪는 로맨스, 깜짝 놀랄만한 호러와 미스터리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무엇보다도 ‘한 인간의 숨겨진 극단적인 공포와 고통에 대한 대서사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서사시 안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항해 일상에서 사투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그 고통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는 이를 시청하 있는 당신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은 아팠고, 아프며, 아플 것이다.



누구나 아픈 과거가 있다.


혼자 견뎌낼 수 있는 아픔도 있지만, 누군가 진심을 다해 바라보고 이해하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도와줄 용기가 필요한 아픔도 있다. 타인이 이해하고 받아들여 정신을 놓지 않도록 손잡아주지 않으면 안 되는 아픔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결국 이런 생각에 다다랐다. 과연 우리는, 자신이 극단적인 공포와 고통에 빠졌을 때 누군가가 도와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만큼, 다른 이가 똑같은 상황에 빠져있을 때, 주변으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이를 알아차리고 도와줄 용기가 있을까. 윌의 상태를 알아봐 준 조이스처럼, 함께 '광인'이 되어줄 수 있을까.




*조현병 관련 설명: 나무위키 조현병 참조 및 일부 발췌.


[이미지 출처]

https://www.netflix.com/kr/title/80057281

https://blog.naver.com/thejig_isup/222079315889

https://blog.naver.com/zosen98/222034777127

https://www.amazon.com/Stranger-Things-Music-Netflix-Original/dp/B075ZB7HY3

https://gamepublish.tistory.com/39

https://astrangerthingsblog.tumblr.com/post/186220731903/could-you-write-the-castle-byers-scene-only-that

https://news.sky.com/story/stranger-things-star-noah-schnapp-parents-help-with-the-80s-references-11860037

https://diply.com/61932/stranger-things-end-of-season-3-fan-theories-that-actually-m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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