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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ney Kim Feb 14. 2021

지정생존자: 정의와 기만 사이

정의라는 이름의 속임수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스포를 담고 있으니 이를 감안하여 읽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정의라는 이름을 한 불합리와 불평등으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저마다 가지고 있는 정의의 기준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정의는 정치인들 사이에서 오가는 의리와 배신, 공약의 이행과 저변에 깔린 목적에만 존재하지 않고, 매출에 따라 존망이 좌우되는 회사와, 그룹 과제를 수행하며 각자 역할의 책임이 얽힌 학교, 그리고 이해관계나 법적인 책임에 얽매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각자의 자리에서 지켜야 할 도리가 존재하는 가정 내 관계까지 포괄하며 도덕부터 법까지 인간의 생각과 행위가 뻗는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


정의는 기본적으로 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체득하고 깨달은 도덕적 기준과 경험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집안의 가장이, 학교의 선생이, 기업의 대표가 그리고 한 나라의 대통령이 가져야 할 도덕적 기준과 윤리적 판단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그 판단에 무수히도 많은 정의가 짓밟히기도 하고, 자칫 잊힐 뻔한 행위가 존중받아 개개인 삶의 앞길을 비추는 등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정생존자'에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저마다 욕심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결국 '각자가 정의한 정의와 나름의 사정’으로 포장된 결정을 무기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세우기에 바쁘다. 마치, 우리 국가와 사회를 보는 듯하다.


과연, 정의란 무엇일까, 대의를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정당할까, 옳은 결과를 위한 그릇된 과정은 용서받을 수 있을까, 소수는 다수를 위해 무조건 희생되어야 할까. 자유주의, 공리주의, 공동체주의 등 우리의 삶은 이미 수많은 이념과 신념의 충돌과 갈등 속에서 현명한 판단을, 아니, ‘자신에게 유리한 판단’을 내리느냐 마느냐의 기로로 점철되어 있다.


결국, 자신의 정의가 누군가의 고통이 되는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과연, 정의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커크먼, 정의의 자격


전례에 없던 국가의 대 위기상황으로 마지막 지정생존자가 된 커크먼은 하루아침에 해고 위기에 놓였던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에서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된다. 이후 3개의 시즌을 거치며, 대통령으로서 자리잡기, 확고한 자리매김 그리고 대선을 통한 진정한 거듭나기 등, ‘지정생존자’는 톰 커크먼의 도덕성과 인간성을 기반으로 한 정의로운 사람이 승리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정치 스릴러다.



전 시즌에 걸쳐, 인간적인 면모는 물론, 계산 없이 상황과 관계를 대하며 수많은 사람을 감화시킨 그도 결국, ‘정의’를 지키고 이를 이룬다는 명분 하에,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정치적인 계산으로 자신을 기만하며 변하고 만다.


대통령 선거를 위한 캠페인 기간, 전직 대통령이었던 강력한 대선 후보인 모스에게 밀리고 있던 커크먼은 이를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첩보를 듣게 된다. 모스가 인종의 비율을 조절할 수 있는 ‘유전자 조작’에 가담했다는 녹취를 입수한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파일은 조작된 것이었다. 커크먼은 끝내 국민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았고 덕분에 모스에게 밀리던 대선에서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진정성과 진실에 큰 가치를 둔 커크먼은 이에 괴로워하며 진실의 왜곡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시작한다. 커크먼은 모스가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기에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논리로 상황을 모면하려 하고, 때문에 대선에 승리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은 ‘정의의 구현’이라는 명분으로 정의롭게 탈바꿈된다.


하지만, 이로써, 커크먼의 상징이었던 진정성은 퇴색되었고,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정당성은 옹색한 변명 뒤에 숨은 욕심으로 탈색되었다.


하지만 이런 그를 두고 그 누구도 당당하게 그를 위선자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우리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무수히도 많은 위선과 변명으로 위기를 모면하며 자라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역시 커크먼처럼, 우리가 행한 행위는 위선이나 기만이라기보다는 ‘더 크고 가치 있는 무언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합리화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정의를 위한 ‘선의’를 지키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중요할까, ‘원하는 결과’라는 욕심을 숨긴 채 ‘대의를 위한 것이라는 포장된 정의’를 내세워서라도 승리하는 것이 중요할까.


시즌 1~3을 아우르는 큰 그림을 놓고 보면 커크먼 역시, 정의롭고자 했고, 정의롭다고 믿었던 자신의 선택과 행동도 결국 누군가의 약점을 이용해 의지를 꺾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선의의 피해자가 있음을 묵과하며 나아가야 하는 ‘정치적 의사결정’의 산물이었음을 깨닫고 스스로 기만자였음을 고백한 것이다.


에밀리, 예외는 없다



에밀리는 커크먼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그와 함께했던 비서관으로 커크먼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시종일관 제삼자의 명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를 보좌하며 올바른 결정으로 인도한다.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정의로운 확신에 찬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특히, 커크먼 대통령 선거 출마 직전 참모들에게 자신의 당선 가능성에 대해 던진 질문을 던졌을 때, 날카로운 냉철함으로 본질을 뚫는 그녀의 신념은 아래의 대사에서 다시금 명확하게 드러난다.


“국가가 아닌 자신을 위한 질문인 '당선 가능성'을 묻는 것은 잘못되었어요. 지금 물어야 할 것은 '대선에 출마한 이유'죠.”


커크먼에게는 언제나 냉한 시각과 견지를 던지는 그녀이지만, 그녀 역시,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를 숨기고, 갈등하며, 속이는 등 그녀가 추종하는 정의와는 다른 행보를 보여주기도 한다. 즉, 정의라는 이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의 약점 앞에서는 정의의 불공평함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에밀리는 커크먼의 대선 승리를 위해 커크먼이 덮어두자고 한 상대방 진영의 약점을 몰래 퍼뜨린 후, 대선의 승기를 가져오기 위해 그랬다는 변명을 하는가 하면, 오랜 기간 동안 아팠던 엄마의 부탁으로 엄마의 안락사를 돕는데 사실 그러한 행위 또한 과연 '완벽하게 정의로웠는가'를 묻는다면 여전히 논쟁거리가 많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과정이 정의롭지 못하고 '결과'만 옳다면 과연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타인의 요청에 의한, 타인을 위한 결정이 위법한 또는 도덕률에 어긋한 행위라도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정의를 위해 도덕적인 과정과 법적인 절차는 무시될 수 있을까. 정답은 없다. 여전히 끊임없는 질문과 토론이 이를 궁금하게 만들 뿐이다.


애런, 중요성의 고 낮음에 대하여

애런은 커크먼의 초대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훅스트라튼 하원 의장의 전략실장, 다시, 백악관의 국가 안보 보좌관을 거쳐, 시리즈의 말미에는 커크먼 정부의 부통령의 자리에 까지 오르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충성, 목표의식, 냉철함, 철두철미함 등 강직하고 정의로움에 어울리는 인물이지만 의외로 그 안에 숨은 이분법적인 잣대가 있다. 이는 직장 동료라면 눈치채기 힘들지만 그의 가족 혹은 연인이라면 어느샌가 미묘하게 느껴지는, 우선순위와 중요성의 고하에 따른 은근한 무시로 드러난다.


그의 여자 친구이자 백악관 참모부장인 이사벨은 능력 있고 정의로운 애런을 존중하지만 애런은 은연중에 이사벨의 업무를 무시하며 깔보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국가 안보 보좌관으로서, 그리고 부통령 후보로서 실제 정책적인 우선순위에 근거한 개인적인 판단에 따른 행동이었지만, 애런의 행위를 보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자신의 일에 대한 업신여김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결국, 관계의 단절이라는 결과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모든 일에는 경중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는 상황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각자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혹여, 경중을 따져 급박하게 먼저 처리되거나 다뤄져야 하는 일이 있더라도 후순위에 놓인 일을 무시하거나 경시해서는 안된다. 이를 부드럽게 관리하고 각각의 단계에 얽혀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 차별받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때 정의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스, 타인을 위한 거짓은 정의로운가



'무엇이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은 시종일관 유쾌함과 썰렁함 사이에서 긴장된 극의 분위기를 해소해주는 역할을 맡은 백악관 대변인인 세스 역시 피할 수 없다.


의대 합격생인 동생을 데리고 공연을 보러 가던 중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차에서 발견된 모다피닐(각성제) 200정은 사실, 의대 시험을 준비하며 졸음을 쫓기 위해 복용한 동생의 것이었지만, 이 때문에 입학 취소를 걱정한 세스가 자진해서 죄를 뒤집어쓴다. 다행히 경찰의 과잉 수사 지적으로 법적인 책임은 면했지만 세스는 자신의 과잉 행위에 대한 신뢰의 문제로 직속상관이자 연인인 에밀리를 난감한 상황에 밀어 넣고 만다. 이미 법적인 처벌은 면했지만 자칫, 개인의 행동이 백악관과 대통령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를 커크먼에게 알릴지 말지에 대한 문제로 갈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가족의 관계를 중시하는 커크먼의 신념 덕분에 모든 갈등은 해소되었지만, 이와 같은 행위로 만에 하나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법적인 처벌을 받았을 때 예상 가능한 행정부와 대통령의 이미지 타격과 그로 인한 현실에서의 후폭풍은 예상보다 거칠게 마련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또 자문하게 된다. 타인을 위한다는 거짓말이 가져오는 결과물은 과연 정의로운가. 자신의 가족을 위하는 모든 행위는 설사, 법망 안에 있다고 해서 이기적이지 않을까. 이 모든 행위의 이유와 결과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그 때문에 이 역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의문이다.


정의의 우선 순위


모든 옳은 결정은 어떤 사안에 대하여 대다수가 수긍할 때 옳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소수는 언제나 존재한다. 선거는 라이벌 대 라이벌의 경쟁이고 결국 다수결에 따라 많은 표를 얻는 쪽이 승리하지만 승리한 쪽이 무조건 ‘정의’롭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정의라는 명제에는 누군가 손해를 보더라도 인정할 수 있는 대의와 명분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가 있을 뿐, 모두를 위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과 악 중 누가 정의로운가를 따져보면 정답은 모호해진다.


애초에 선에게는 악이 정의롭지 못하고, 악에게는 선이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애초에 틀린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대신, 이를 결정하고 행하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정의하는 정의에 따라 해당 국가의, 조직의, 기업의, 학교의, 가정의 정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는 또,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또는 ‘개인이 우선하냐, 집단이 우선하냐’는 질문처럼 우선순위에 대한 딜레마처럼 여겨질 것인데,


이유인즉, 이는 과연, '정의’를 정의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념, 가치관은 정의로운가에 대한 질문으로 또 이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보면, 정의의 ‘정의’와 이를 행하는 사람보다는, 특정 행위의 ‘정의로움’에 대한 질문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인다. 인류사를 통틀어 보면 항상 ‘정의’에 대한 자문에 의해 모든 조직과 국가가 생겨났고 번성했으며 쇠락했고, 또 다른 ‘정의’론자들에 의해 새로운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인류라는 종과 국가와 문화가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과 환경은 정의의 투쟁에 의한 산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하며 계속해서 역사를 이어갈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힘이자 ‘정의'이기 때문에.




[이미지 출처]

https://1boon.kakao.com/fanzeel/Netflix027?view=katalk

https://7179.tistory.com/183

https://blog.naver.com/as2001qw/222175076781

https://m.blog.naver.com/brianhwang10/220972889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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