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음에 대하여

그리고 그 기저에 깔린 두려움이라는 어리석음

by Rooney Kim


어린 시절부터 글 쓰는 걸 좋아했다. 학창 시절엔 백일장이니 문학제 등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고, 상을 받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는데 내 생각, 삶에 대한 정의, 일상을 바라보는 시각, 불합리한 요소들, 정의롭지 못한 사람과 사건들을 보며 막연히 수필, 칼럼, 소설 등을 써대며 생활에서 체득한 감정과 깨달음을 끄적끄적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만의 문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이 재밌었다.


하지만 그때는 간과했다. 좋은 글도 모방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그저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제 아무리 베스트셀러에 잘 나가는 작품이라도 막상 읽어보면 생각 외로 큰 감흥이 없는 글이 있는가 하면, 웹서핑을 하다 문득 맞닥뜨린, 이름조차도 생소한 한 커뮤니티의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조회수가 100이 되지도 않는 어떤 글은 이미 감히 범접조차 못할 경지에 이르러 나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며 수준 낮은 나의 자만을 유린하듯 저릿한 반항심과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글도 있었다.


변명 같지만, 유명한 작가들의 글을 많이 읽지 않는 이유는 혹시, 내가 그들의 글에 압도되어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도 못한 나만의 색깔이나 향을 잃지는 않을까, 너무나도 매력적인 문장과 세련된 문단의 끝맺음에 매료되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흉내 내거나 따라 하지는 않을까 하는 바보같이 부질없는 생각에서다. 정말 매력적인 글과 어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따라 하지 않나.


카리스마 넘치는 글의 힘은 대단하다. 이 위력은 대부분 작가의 필력, 호소력에 기인하지만, 엄청난 양의 독서량, 공부, 사전 조사가 필력보다 먼저 작가 안에 쌓인 결과다. 게다가 이미 수백만의 사람들이 읽은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의 경우, 이를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는 현실적인 인식도 한 무명작가의 소심함에 더 소심한 한 스푼을 더 얹는데 한 몫한다.


고백하건대, 나이가 들수록 그들의 글을 자주, 많이 읽지 않은 이유는 그저, 그 어떤 것에도 강력하게 영향받지 않은 나만의 것을 스스로 개척하고 싶다는 ‘어리석은 변명’이 내 가슴 한 구석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명, 대륙, 왕족, 가문에서 공통적으로 저질러온 실수가 있다. 그 실수는 자신의 것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어리석은 믿음과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선사시대부터, 문명시대, 봉건시대, 산업시대, 이념 시대, 그리고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목적과 이유로 인류는 자신의 선을 이루기 위해 무수한 충성과 죽음을 강요하며 달려왔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모두 어리석은 판단에 기인했다.


‘내(우리)것을 지키고, 보전하여 후대에 전달해 내(우리)것의 영원한 번성을 위해!’


하지만 모든 권력은 어리석게도 주변부만 훑고 얼른 태운 뒤 시속 300km를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본 정면의 풍경과 같다. 좁아진 시야를 기반으로 하는 판단은 외부의 신선하고 훌륭한 의견은 무시해버리는 저주에 걸리 듯, 거의 모든 권력가들은 항상 같은 실수를 반복해왔다. 외부의 고견과 시선은 그저 자신의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조작된 바이러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현대의 권력뿐만이 아니라 역사를 통한 모든 왕가의 가문들을 보면 그 어리석은 본능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문의 정통성을 위해 집안사람끼리 결혼을 하고 대를 이어가다 생긴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전병과 그 외 수많은 종류의 유전병이 그 위험성을 보여주었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혈통과 순혈주의는 결국 섞이지 않으면 도태와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열차에 연료를 더 태우는 것과 같다.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은 믿음과 자신의 것을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배우지 않고, 구하지 않으며, 더하지 않았고, 이는 결국 항상 어리석은 결과로 이어졌다.


좋은 작가의 훌륭한 글을 읽는 것은 생각의 다양성, 아이디어와 지식 그리고 새로운 스타일의 문장력을 얻기 위해 중요하다. 너무나 매력적이고 강력한 마력을 가진 글 때문에 내 색과 문체가 바뀌었다고 느낀다면 이는 ‘자신만의 색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색을 잃고 계속해서 모방하는 글을 쓰고 있다고 느낀다면, 이는 오히려 더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양성은 또 다른 하나의 자극을 의미하지 않고, 나와 다른 수 천, 수 만 가지의 색다른 자극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수십 차례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무성한 잡초 사이에서 오롯이 피어나는 자신만의 꽃을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그 꽃 역시 결코 다른 잡초보다 더 나은 꽃은 아니다. 그 꽃을 피운 줄기는 잡초였고, 다른 잡초들도 아름답다.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제 그 잡초는 ‘내가 이름 붙인 나만의 꽃’이라는 점. 그렇게 자신 만의 색은 탄생한다.


피와 아이디어와 체험은 섞일수록, 다양할수록 합리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합리적이라는 의미는 대다수의 다른 사람들이 장황한 설명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새로운 것은 ‘체험, 적용 또는 거부, 응용,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것’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과정 없이 탄생한 것은 지루하고 고루하며 독선적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세상을 탓하고 원망하는 무명의 뒷배경은, 아주 자그마한 것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자극을 바이러스로 인식해 끊임없이 외출을 자제하고 골방에 갇혀 사는 것과 같다. 작은 것을 위해 큰 것을 포기하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무섭다면 마스크를 쓰고, 손을 씻고, 위험한 곳의 방문만 자제하면 된다. 두려움은 어리석음을 낳고 어리석음은 도태를 생산하며 도태는 멸종으로 이어진다. 무언가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면 이를 유발하는 두려움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변화로의 노출은 항상 피곤하고 두렵다. 하지만 그 두려움의 두께는 1cm도 되지 않아 손으로 살짝 밀면 넘어져 사라지기도 한다.


‘그걸 알지만 그렇게 하기 힘든 게 현실 아닌가?’라는 반문이 든다면, 아직은 멀었다. ‘맞아, 그건 그렇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가야 할 만보 중 가벼운 한걸음을 내디뎠다.


깨달음은 말과 글로 보여줄 수 없다. 오직 행동만이 이를 증명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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