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꿈 속이었지만 정환이는 형과 대화하는 게 너무 반가웠어. 어린 시절 자신이 잘못을 하면 무섭지만 듬직한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혼내고 또 나중에 위로해주던 형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정환이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지. 사실 꿈속이라 진짜 눈물이 난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이미 영적으로, 감정적으로 그런 상태가 된 거였어.
“알겠냐고. 어서 대답해.”
정민은 이참에 정환이의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태도에 대해 적어도 한 번은 크게 혼을 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조금은 차갑고 냉정하게 정환이를 몰아붙였어.
“…응. 형, 나도.. 반성은 많이 하고 있어. 그런데 병원에서는 내성적인 게 원래 내 색깔이래 그런데..”
“그런데 뭐?”
“노력하면 일상 대화나 친구랑 지내는 거랑 뭐.. 트라우마도 극복할 수 있대..”
정민은 정환이의 얼굴을 한 동안 빤히 쳐다보았어. 몇 년 만에 제대로 쳐다보는 동생의 정면 얼굴이었지. 정민이도 몰랐어. 정환이의 두 눈에 우울감이 가득하고 다크서클 아래로 땅으로 꺼질 듯이 쳐진 입꼬리가 녀석이 얼마나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아왔는지 그제야 조금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너, 설마 아직도 그 일 때문에 이렇게 괴로운 거야..?”
“형.. 그거 정말 내 잘못.. 아니지..?...”
해마다 명절이 되면 여기저기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친척들을 만나러 오잖아. 5년 전이었을 거야. 정민이네도 오랜만에 만난 사촌들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 당시에 정민은 대학생이었고 정환이와 사촌들은 모두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정도였어. 그렇게 또래가 모였으니 얼마나 재밌었겠어. 마침 동네 친구들도 많았고 걔들과 다 함께 숨바꼭질을 했던 거야. 골목이 많아서 위험하니 정민이가 보호자 역할도 할 겸 애들이랑 놀아주고 있었지. 마침, 정환이가 술래였어. 친척들과 동네 친구들은 골목의 후미진 곳, 나무 뒤 등 여기저기 숨었고 정환이가 얘들을 찾으러 가던 중이었어. 정환이가 골목에서 빠져나올 때 은정이라는 동네 친구가 그 앞에서 몰래 나와 홈으로 살금살금 걸어가는 중이었지. 그때 정민의 귀에 멀리서 달려오는 차 소리가 들렸고 정민이는 정환이에게 살짝 귀띔했어.
“쟤 그냥 보내줘라. 지금 잡으러 가면 쟤 뛰어가서 위험해. 차오는 것 같거든.”
하지만, 술래가 된 정환이 귀에는 그게 들릴 리 만무했고 애들이 달려 나오면 차가 서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안전불감증 상태가 된 거야. 정환이는 살금살금 빠져나가는 은정이를 향해 냅다 뛰기 시작했고 깜짝 놀란 은정이는 뒤에서 달려오는 정환이를 본 뒤 홈을 향해 전력 질주를 했어.
‘빵- 빠아아 앙————‘
순간, 골목에 경적 소리가 엄청 크게 울렸고 급브레이크에 미끄러지며 타이어가 찢어질 듯 시끄러운 소리가 골목을 채웠지. 곧, 크고 둔탁한 소리가 들렸어. 그렇게 은정이가 차에 치여 날아가 벽에 부딪히고 말았어. 이를 정면에서 본 정환이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서 하얗게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떨고 있었고, 뒤에서 이를 본 정민은 쏜살같이 달려가 은정이의 상태를 확인했어. 머리를 세게 부딪힌 은정이의 상태는 굉장히 안 좋았고, 바로 119에 전화를 했지. 곧 어른들이 나와서 사태를 수습했어. 결국, 사건은 골목에서 5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운전하던 음주 운전자가 가해자가 되면서 끝이 났어. 명절이라 다들 집에서 한 잔씩 걸치고 나오잖아. 그게 화근이었던 거지. 결국, 안타깝게도 은정이는 그들 곁을 떠났고, 정환이는 이후 말을 잃었어.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었던 거야.
“정환아, 나라도 달려갔을 거야.”
“형.. 흐흐흑.. 나.. 너무 괴로워서 죽고 싶었어.. 내가 달려가지만 않았어도.. 크흐흑..”
정환이는 5년간 꾹 참아온 말을 내뱉으며 미친 듯이 울기 시작했어. 지난 5년간 그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는 말과 함께 그 누구 앞에서도 보인 적이 없는 눈물을 쏟아낸 거야. 정민은 정환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으며 토닥여줬어.
“그때도 얘기했지만 니 잘못 아니야.”
“흐흐흑.. 흐흑.. 정말..?”
“그래 인마. 술 마시고 골목에서 50킬로미터로 달린 사람이 잘못이지 거기서 놀고 있던 우리가 왜 잘못이야? 너 이걸로 이렇게 오랫동안 괴로워한 거야? 난 니가 병원에 다니길래 다 극복한 줄 알았더니.”
“너무 괴로웠어.. 꿈에 은정이가 나왔는데 계속 그 장면이 보였어.. 내가.. 내가 은정이를 잡으러 가지만 않았어도..”
“짜식아. 정 괴로우면. 내가 은정이 만나러 가볼게. 니가 미안해한다고도 말할게. 그러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 그리고 지난 기억에서 이제 그만 빠져나와. 무엇보다 그건 니 잘못이 아냐. 알겠어? 그리고 너 원래 이런 성격 아니었잖아. 얼마나 쾌활했냐. 형이 다 기억해.”
“으.. 응.. 고마워.. 형, 형 이 말하러 온 거지? 나도 형이 그렇게 말해주길..”
“아, 아닌데? 이건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돼서 내 예전 생각을 말해주는 거고. 지금은 나한테, 아니 우리한테 훨씬 중요한 얘기를 해주러 온 거야."
정환이는 순간 울음을 그치고 정민을 쳐다보았어. 정민의 모습은 죽기 전과 다를 바가 없었고 진지했어.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다면, 이 모든 것이 꿈속이라는 걸 정환이가 인지하고 있었다는 거야.
“너 비트코인이 뭔지 알지? 너 코인 알아?”
정환이는 꿈속에서 코인 얘기를 꺼내는 형의 모습에 조금은 당황스러웠어. 친구들 중에도 코인으로 수십 만원을 날린 친구도 있었고, 엄마 몰래 카드로 긁어서 투자했다가 오백만 원을 번 녀석도 있었기 때문이야.
“너도 해?”
“… 아니. 왜 그래 형?”
“그래도 앱 깔고 로그인하고, 시드 넣고 뭐 이런 건 할 줄 알지?”
“그거야.. 쉽지. 그런데 왜?”
“너 개인 통장은 있어? 1일 이체, 출금 한도가 얼마야? 혹시 알아?”
정환이는 다짜고짜 코인, 은행계좌를 묻는 형을 이해하기 힘들었어. 이 모든 게 다 꿈속이라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
“잘 들어, 내가 아이디랑 패스워드를 줄테니까. 우선 코인 거래소로 들어가서 거기에 있는 비트코인과 다른 코인들을 모두 팔아. 그리고 그걸 내 개인 암호화폐 지갑으로 보내줘. 개인 지갑 아이디랑 비번도 알려줄게. 그런데 너 혹시, 내 휴대폰 아직 가지고 있어??”
정민이 죽은 후 거의 모든 유품은 불태우거나 버렸지만 어쩐 일인지 정환이가 정민의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응.. 그냥 형을 추억하려고 내가 서랍에 넣어뒀어.”
“예쓰! 됐다. 됐어. 좋아, 그럼 거기에 내가 사용하는 모든 거래소 앱, 개인 지갑, 개인 통장 계좌가 전부 있으니까 그걸로 하면 되겠다.”
정민의 얘기를 듣던 정환이가 다시 물었어.
“형, 그런데 그럼 그걸로 뭘 어떻게 하면 돼? 현금화해서 돈을 엄마, 아빠한테 드리면 돼?”
그때부터 정민은 정도령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어. 비록 꿈속에서는 둘만 만난 거지만, 이 만남 자체를 정도령이 도와주고 있었기에 현재 정민이는 정도령과 함께 있었던 거지. 그래서 정확히 자신의 재산이 얼마나 있고 이를 어떻게 쓸지에 대해서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던 거야.
‘정도령이 어떤 사람인지도 아직 모르는데 이걸 다 깔 순 없잖아.. 어쩐다.’
이런 정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정도령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꿈속에서 정민이가 정환이와 잘 연결될 수 있도록 돕고 있었어.
“형, 거래소에 얼마가 있어? 거래소가 몇 개야?”
“자, 일단, 아이디랑 패스워드를 알려줄게. 내 폰으로 들어가면 자동 로그인이 될 텐데 지문으로 암호를 걸어둬서 수동으로 로그인해야 할 거야.”
“알았어. 그럼 거래소마다 코인들을 전부 팔아?”
“응.”
“다하면 얼만데? 오백만 원? 아니다. 형은 직장인이니까 한 천만 원은 되려나? 천만 원이면 대박이겠다. 와~”
정민은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어. 정환이와 꿈속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하려면 정도령이 필요한데 2,500억 원이나 되는 재산이 있다는 걸 알면 정도령이 눈이 돌아갈게 뻔했기 때문에 이 모든 내용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거였지.